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정원 Dec 26. 2021

자리를 지키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다.  

이팀장의 육我 휴직 일지 - 3rd day

육아 휴직을 하기로 마음을 먹고 아직 회사에 이야기는 못하고 있던 주말 밤에 아내와 "82년생 김지영"을 뒤늦게 보았다. 보기 전에 미처 줄거리를 알았더라면 마음에 준비라도 했었을 텐데.. 다르지만 닮은 이야기에 난데없이 눈물이 났다. 이런저런 장면에서 감정 이입이 되면서 어렵게 다 보고는 상무님께 이야기할 용기가 났던 기억이 난다. 


극 중에 김지영이 겪었던 전쟁 같은 육아는 우리 집에는 사실 없다. 그 치열했던 야전은 이미 아내가 다 치렀으니.. 12월 24일 휴직 첫날에는 아이들이 모두 줌 수업을 하는 날이었는데 9시가 되니까 각자 방으로 알아서 들어갔다. 그리고 내가 청소를 하고 짐 정리를 하고 점심 준비를 하고 글을 쓰는 동안 열심히 자기 방에서 자기의 삶을 살아갔다.


아이들이 커서 손이 덜 들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나의 존재가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어른이 집에 없으면 책임감이 강한 첫째는 둘째를 본인이 챙겨야 한다는 부담감을 느낀다. 그리고 본인도 해야 할 수업이 있으니 계속 엄마 보고 안 나가면 안 되냐고 보챘다. 잘 지낼 수 있지만 아직 의지할 누군가가 필요한 나이. 딱 열세 살이다.


둘째는 혼자 있을 수는 있지만 불안하다. 그래서 자주 계속 전화를 한다. 아빠? 언제 와? 어디쯤 왔어? 엄마가 있어도 그러지만 엄마가 어디라도 나가면 10분이 멀다 하고 같은 질문을 계속한다. 재밌는 일이 있으면 안 건드리면 좋겠지만 혼자 있는 시간이 무서운 가 보다. 아홉 살 답다. 


그런 아이들의 마음을 아는 아내는 그래서 늘 발걸음이 무거웠을 거다. 애들 다 키워서 이제는 힘든 시간들도 다 지나갔네 하며 위로하는 다른 엄마들의 위로가 고맙지만, 일면 사실이지만 크게 와닿지 않는다. 늘 빨리 돌아 가야 할 것 같고 나와 있으면 무언가 잘못하고 있는 것 같은 멍에를 쓰고 살아갔다. 


영화에서 걱정하며 병원 꼭 가보라고 이야기하고 직장으로 나서는 공유가 가고 나서 문을 닫는 순간, 정유미의 눈빛이 확 달라지는 장면이 있다. 그녀에게 집은 온전히 자신에게만 의지하는, 그래서 부담스러운 장소가 되어 버린 듯했다. 얼마나 답답하고, 얼마나 외로웠을까...

공유가 가고나서 돌아서 집을 보는 그녀의 눈빛이 애처롭다.

그래서 나는 당분간 다른 일정은 잡지 않고, 집돌이가 되어 여기 이 공간을 지키려고 한다. 그러면 아내도 누가 아이들을 돌볼지 걱정할 필요 없이 훌훌 나설 수 있고, 아이들도 혹시 혼자 집에서 있는지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지. 사이사이 청소도 하고, 요리도 하고, 장도 보고, 운동도 하겠지만.. 내가 가장 해야 하는 일은 "거기 있어 주는 것!" 


지난 첫날에도 아내는 내가 있으니 아무 부담 없이 오전에 나가서 상담 전에 커피 한잔 하고, 상담받고 책도 좀 보다가 점심 먹으러 들어왔다. 그 전날 밤에 정글의 법칙에서 박수홍이 끓였던 짜장 + 해물 라면을 섞어  만드는 걸 따라 만든 괴식을 보고 피식 웃더니 아이들과 즐겁게 먹었다. 그래 여기가 내 자리다. 자리를 지키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다.  


매거진의 이전글 규칙적인 삶을 유지하기 위한 작은 습관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