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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정원 Feb 10. 2022

초심을 잃지 않으려면 계획이 필요하다.

이팀장의 육我휴직일지 - 44 days

예전에도 휴가가 되면 다시 꺼내어 읽어 보곤 하던 나의 최애책인 로마인 이야기 카이사르 편을 다시 읽고 있다. 4권의 마지막에 갈리아 원정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군대를 해산하라는 원로원으로부터의 최후통첩을 받고 루비콘 강 앞에 선 카이사르가 이렇게 말했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이 강을 건너면 인간 세계가 비참해지고 건너지 않으면 내가 파멸한다. 나아가자. 신들이 기다리는 곳으로, 우리의 명예를 더럽힌 적이 기다리는 곳으로. 주사위는 던져졌다!"

건곤일척의 운명적 선택을 한 카이사르만 하겠냐 마는 육아 휴직을 처음 결정할 때의 나의 마음도 못지않게 비장했다. 20년을 다닌 회사에서 맡은 역할을 잠시 멈추겠다고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은 아 이제 회사를 그만두고 다른 곳을 찾아보려나 보다 라고 곡해했다. 지금 진행되고 있는 여러 프로젝트에서 배제되는 것도 감수해야 했다. 조금 더 불확실해지는 미래만큼 힘들어하는 가족을 돌보는 일이 절실했고 주사위를 던진 순간 이후부터 그 선택을 후회해 본 적은 없다.


그러나, 주사위를 던졌던 그 순간만큼 지금도 절실한가라고 물어본다면 나는 답을 할 수가 없다. 그저 새로운 종류의 일에 적응하고 가족들과 하루하루를 보내는데 충실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을 뿐이다. 그것만으로도 참 의미 있는 시간이지만, 하루를 보냈다는 건 그만큼 휴직을 마치고 다시 일터로 돌아가야 하는 시간도 다가온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대로 이렇게 시간을 보내고 나면 잘 쉬었으니까, 원 없이 해 봤으니까, 괜찮아질 거라고 낙관하는 건 그날의 절실함에 무책임한 일이다.  


집을 지킨 지난  달여 기간 동안 아내는 아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방학이라 아이들이 모두 집에 있는 상황이지만 온전히 홀로 챙겨 주어야 하는 부담에서 벗어나면서 운동도 하고, 사람들도 만나고, 의미 있는 강의도 하면서 여유를 찾았다.  자고 즐겁게 활동하는 그녀를 보면, 결국 우울한 마음은 해야 하는 일들을 하기에도 버거운 상황에서 하고 싶은 일들을   없는 상황이 반복되면 나타나는 듯하다. 특히 감기나 몸살처럼 몸이 아픈 상황이어서 본인도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 되면   것이다. 누구나 그런 상황이면 힘들 것이다. 그녀에게는  힘듦이 그런 형태로 드러나는 것뿐이다.


1월 말에 부산을 다녀와서 아내가 잠시 몸살에 걸린 적이 있었는데 강의를 하러 잠실까지 운전하고 가야 하는데 엄두가 나지 않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운전기사 역할을 맡아 데려다주고 다시 돌아오는데 아내가 이렇게 말했다. "아파서 약 먹고 누워 있는데 어쩌지 하다가 뭐 너무 힘들면 당신한테 데려다 달라고 하지 뭐라고 생각하니까 일도 걱정이 안 되는 거 있지. 고마워." 여행을 가서 몸이 힘들고, 몸살 기운으로 아프고, 아이들은 집에 있어서 챙겨 줘야 하고, 해야 할 공적인 일도 있는, 예전 같으면 가장 힘들었을 상황이었지만 그렇게 수월하게 넘어갔다. 이대로 시간을 보내면 휴직하는 동안에는 괜찮을 가능성이 높다.


숙제는 지속 가능하게 만드는 것이다. 내가 복직을 하더라도 이런 상황이 유지되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을 지금 해야 한다. 업무적인 관점에서는 집안일을 배분하고, 일의 가짓수를 줄이고 유튜브나 책을 쓰는 것 같은 한 번도 해 보지 않은 일들은 휴직 기간 내에서 시도해 보고 어떻게 진행하면 될지 경험을 쌓을 수 있게 하면 좋겠다. 조직적인 관점에서는 아이들에게도 담당하는 집안일을 정하고, 특히 학업에 대한 계획을 잘 짜서 새로 중학교 들어가고 앞으로의 진로를 고민하는 에너지를 줄여 보면 좋을 것 같다. 가족들이 함께 하는 정기적인 이벤트를 만들어서 서로 Cheer up 하는 분위기가 조성되면 더 도움이 될 것이다.

어제 문득 바다 생각이 나서 들린 궁평항. 이런 이벤트도 도움이 된다.

무엇보다도, 당사자 스스로가 본인 컨디션을 관리하고 원하는 활동을 하기 위한 체력을 쌓고 좋은 습관들을 만들 필요가 있다. 꾸준히 운동하고 체중도 관리해서 일들이 몰려와도 버틸 수 있어야 한다. 병원에서 치료도 받고, 상담도 계속 받고 있으니 더 나아지겠지만 단지 지금의 좋은 상황에만 안주해서는 안된다. 절실했던 초심을 잃지 않으려면 계획이 필요하다. 남은 방학 기간 중에 가족들과 함께 만들어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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