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분과 권력이 다 왔을 때 더 조심해야 한다.
악은 이토록 거침없이 자신의 길을 가는데 어째서 선은 끊임없이 자신을 증명해야 하는가?
오래됐지만 '환혼'이라는 드라마에서 유준상이 한 말이 요즘 유행이다. 삼국지를 보아도 권력을 잡은 조조는 거침이 없는 반면, 인의를 앞세우는 유비는 늘 신경 써야 하는 부분이 많다. 그래서 손해도 보고, 백성들도 고생시키는 일이 잦았다. 효율과 승리라는 관점에서 보면 惡이 더 낫다는 점을 부인하기는 쉽지 않다.
오래된 대사가 이제야 빛을 보는 이유는 아마도 지난 연말에 있었던 일련의 사건들 때문이리라. 현직 대통령이 본인이 지휘하에 치러진 선거를 부정선거라는 망상에 사로 잡혀서 국회를 믿지 못하고 군을 동원해서 그 활동은 정지시키려고 한 계엄을 상상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다행히 시민과 국회가 빠르게 계엄을 해제하면서 일상을 돌아가면 좋으련만, 추운 겨울 길 위에는 다른 곳을 사람들의 목소리가 시끄럽게 부딪히고 있다.
지지율 11%를 찍은 윤석열 대통령은 거침이 없다. 스스로 이야기했던 정정당당하게 조사받겠다는 말은 잊은 지 오래다. 국회에서 탄핵 소추안을 의결해서 직무는 정지되었지만 관저 안에 숨어서 끝까지 싸우자며 극렬 지지자들을 자극한다. 그리고 그동안 베일에 감추어져 있던 극우 세력들이 이런 메시지에 화답하면서 사회 전면에 나서고 있다. 부정 선거를 거론하고, 탄핵을 반대하고 윤석열의 복귀를 요구한다. 지지율이 40%에 육박한다는 여론 조사도 나왔다. 계엄 후 한 달, 그들은 어찌 이리 기세 등등 해 진 걸까?
돌이켜 보면, 우리나라의 역사는 독재와 반독재, 군사정권과 민주화 운동이라는 선과 악의 구도가 명확했다. 그리고 늘 다수였던 악에 대해 소수의 선은 단결하고 투쟁하고 강하게 의견을 주장하는 어려운 길을 걸어왔다. 그 덕분에 1980년대 대통령 직선제를 이루고 문민정부가 탄생했다.
그 뒤로 보수와 진보의 두 축으로 나누어 있지만, 사실 둘 사이는 선과 악으로 나눌 명분은 부족하다. 각자가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가 차이가 나는 것일 뿐이니까 나와 생각은 다를 수 있지만 그렇다고 배척해서는 민주주의가 자리 잡을 수가 없다. 1987년 이후 40년의 시간 동안 우리는 선거라는 제도를 통해 몇 번의 평화로운 정권 교체를 이루어 냈다. 그리고 박근혜 때에는 큰 소동 없이 탄핵이라는 절차도 평화롭게 이루어 내면서 우리보다 민주주의를 시작한 서방 국가들에게조차 찬사를 받았다. 우리에게는 분명 성숙한 민주주의 시민 의식이 존재한다.
그러다, 이번에 그 의식에 전혀 미치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평화로웠던 밤에 뜬금없는 계엄 선언에 절대다수의 국민들은 반대할 것이다. 선거가 조작되었다는 부정 선거론도. 무엇보다도 군대를 통해서 정치적인 반대 세력을 처단하고자 하는 방식은 누구도 옳다고 받아들일 수 없다. 절대다수가 반대하는 惡이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그렇게 모습을 드러낸 악을 무력화하고 헌법 질서 안에서 처단하면 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그 반대서 善을 지키는 측의 움직임이 너무 급하다. 대통령이 직무 정지가 되면서 국가 권력의 지분은 국회에서 다수 의석을 차지한 야당에 쏠릴 수밖에 없다. 명분도 있고 힘도 있는 그 순간이 사실 가장 조심해야 한다. 사람들은 약자에게 동정심을 가질 수밖에 없고, 판결하고 벌을 집행하는 칼의 의도와 도덕성을 의심한다. 그래서 조금만 흠결이 보여도 그걸 핑계 삼아서 서로 네가 더 나쁘다는 양비론을 통해 진흙탕 싸움으로 끌어내리려고 한다. 유준상의 그 대사처럼 선을 지키려면, 스스로를 증명하는 수고를 감내해야 했다.
어렵게 대통령 탄핵을 성공한 것까지는 괜찮았다. 그러나, 헌재 재판관 임명 동의하지 않는다고 국무총리를 바로 탄핵하고, 최상목 권한 대행이 2명만 임명한 것도 비난하고, 탄핵 소추안에서 내란죄에 대한 항목을 사유에서 제외하는 사이에 사람들은 善의 의도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다들 알고 있는 야당 대표의 사법 리스크라는 스토리도 있지 않은가? 그들에게는 체포 영장이 나와도 응하지 않는 윤석열 대통령 측과 대법원 판결 나기 전에 대선을 치르길 원하는 민주당이 사안의 경중과는 상관없이 비슷한 레벨이 되고 있다. 둘 다 일반 사람들에게는 해본 적도 없고 할 생각도 없고 받아들이기도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다행히 헌법 재판소의 최근 진행 상황을 정리한 리포트들을 보면, 헌재는 확실히 현 사안의 엄중함을 인지하고 있어 보인다. 그래서 국회가 내란죄를 빼도, 윤석열 대통령 측이 자료를 제대로 제공하지 않으면서 재판을 미루려는 꼼수를 펴도 그렇게 흔들리지 않는다. 헌재의 역할이 윤석열 대통령의 죄를 확인하고 처벌을 확정하는 것이 아니라, 윤석열이라는 사람이 다시 대통령이 되는 것이 타당한지에 대해서 판결을 내리기 위한 절차를 밟고 있다. 그 답은 우리 모두가 사실 알고 있다.
그러니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재판 일정을 억지로 당기려는 변화는 자제해야 한다. 여당이 더 강경하게 나올수록 두 번 세 번 소통을 하려는 제스처를 보이며 낮은 자세로 접근해야 한다. 앞에서도 언급한 대로 국가 권력의 중심축은 대통령이 계엄을 선언하고 실패하고 그래서 직무 정지가 된 후부터 이미 국회로, 그것도 다수당을 차지한 야당에게 기울어져 있다. 그럴수록 규정을 지키고, 낮은 자세로 두 번 세 번 만나자고 하고, 손해 보는 일도 받아들이자. 그래야 대중들은 선의 의도를 의심하지 않는다. 그래야 우리가 지켜야 하는 가치를 공감하는 사람을 더 늘릴 수 있다.
기업도 스타트업일 때와 중견 기업이 되었을 때 비전과 목표가 다르고 운영 방식도 바뀌어야 한다. 1등 기업이 되면 사회적 책무도 다해야 하고, 상생 제도에도 신경 써야 한다. 정치도 마찬가지다. 악이 명확해졌다고 독재를 반대하면서 크게 소리쳐서 외치던 시절의 방식은 작금의 상황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우리 시민들의 의식은 한남동에서 울려 퍼지는 괴담에 흔들릴 정도로 허약하지 않다. 미셀 오바마가 했던 이야기처럼 그들이 저급하게 갈수록 우리는 품위를 지킬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