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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하지 않는데도 용기가 필요하단다.

by 이정원


사랑하는 수인아.


생일 축하해. 늘 생일이 기말고사 준비 기간이라 제대로 즐기지도 못한다며 아쉬워했지? 이제 그렇게 6월 말만 되면 시간에 쫓기는 시기도 얼마 남지 않았네. 벌써 고등학생이라니 꼬맹이였던 네가 그만큼 훌쩍 커버렸다는 걸 새삼 다시 깨닫게 된다.


학교에서 반장도 하고 동아리도 새로 시작하고 학생회까지. 늘 바쁘게 지내는 널 보면 여러 생각이 든다. 부산에 계신 할아버지는 참 엄하신 분이셨거든. 그리고 아빠가 어릴 때 집에 어른들이 많아서 장남 장손이었던 아빠는 어떻게 하면 큰소리 나지 않고 지나갈 수 있을까 자연스럽게 눈치를 살폈던 것 같아. 그런 성향과 태도를 이어받아 가족과 선생님 친구들까지 주변 사람 챙기느라 애쓰는 너의 모습을 보면 아빠 딸인 것이 더 느껴진단다.


그런 태도가 절대 고쳐야 할 나쁜 건 아니야. 아빠도 그런 눈치 덕분에 학교에서도 회사에서도 해야 할 일을 찾아서 하는 사람으로 인정받았지. 애쓰는 만큼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고 받는 그들도 좋고, 주는 나도 좋았어. 수인이도 같은 마음 일거야. 그지?


그런데 수인아. 어쩌면 우리가 배려하고 미리 고민하고 애쓰는 마음 뒤에는 "내가 그렇게 하지 않으면 미움을 받을 거야."라는 두려움이 숨어 있을지도 몰라. 남들이 내게 잘 대해 주는 건 내가 잘해주는 덕분이라는 마음속에는 홀로 될까 두려운 마음도 있는 것 같아. 그래서 미움받을 용기라는 말도 있잖아?


아빠도 너랑 비슷하게 이곳저곳에서 이 일 저 일 모두 참 열심히 살았었는데, 이제 인생의 절반 이상을 살아 보고 나니까 그런 게 아니더라. 사람들은 사실 다들 자기 삶을 사는데 바쁘고 나한테는 큰 관심이 없어. 그저 상황이 좋고 서로에게 도움 되면 좋은 거고 상황이 나빠서 불편하면 싫은 거지. 그러니 무얼 해야 인정받고 무얼 해야 사랑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상황마다 달라지는 투자 대비 효율이 많이 떨어지는 생각이더라고.


대신에 상황이 좋아도 나빠도 늘 내 편이 돼주는 사람들이 있지.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 주는 사람. 내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이해해 주고 그도 내게 자기 모습을 있는 대로 보여 주는 사람. 그런 사람이 한 둘만 곁에 있어도 힘든 시간들을 견뎌낼 힘을 얻을 수 있겠지. 아빠는 수인이 곁에 이런 사람들이 많지 않아도 꼭 있으면 좋겠다. 그리고 너에게 진짜 소중한 사람들에게 전할 마음을 아끼기 위해 가끔은 아무것도 하지 않을 용기가 필요한 것 같아.


아빠도 엄마도 네게 그런 사람이 되어 줄 수 있게 노력할게. 우리도 부모가 처음이라 수인이가 이렇게 크면 좋겠다고 이런저런 기준을 정하고 또 그러길 설득하곤 했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늘 넌 최선을 다해 왔고 우리는 그걸 믿어 주면 되는 거였어. 그걸 네가 고등학생이 된 이제야 깨닫게 된다.


우리 딸의 열일곱 번째 생일을 다시 한번 축하해. 이제 정말 다 컸구나. 힘든 입시 와중에도 너답게 보내고 있는 모습을 늘 응원한다. 부산에 가면 할머니가 따뜻한 집밥 차려 주시면서 수고했다 위로해 주시듯이 엄마 아빠도 그렇게 여기 있을게. 시험 잘 마치고 다시 오지 않을 학창 시절 여름도 즐겁게 보내길 기원할게.


2025년 6월 28일

아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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