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을 옮기자, 내가 사랑하는 것들에게로
절이 싫다고 중이 떠날 수 있나? 내가 중이라면 절을 떠나지 못할 것 같다. 그렇다. 나는 버티는 중이다. 코로나로 재택근무와 출근을 병행한 지 1년이 훌쩍 넘어가고 있다. '재택근무하면 편하지 않아?'라고 말하는 주변 사람들, 물론 출퇴근 왕복 4시간을 생각하면 진심으로 감사하다. 하지만 공황장애 증상이 심해지고, 사람의 눈을 마주치고 말하는 것이 어려워진 요즘 나에게 화상 회의는 쉽지 않은 일이다. 사람을 직접 마주할 때는 타인의 얼굴을 마주하는 게 어려웠는데, 화면에서는 애써 밝은 표정을 짓고 있는 내 얼굴을 보는 게 힘들었다. 쉼 없이 울리는 메시지에도 숨이 막힌다. 마음이 아프면(사실 뇌의 문제지만) 몸에 이상 증상이 나타난다. 복통도 부쩍 자주 느낀다. 아직은. 참을 수 있다. 버텼으면 좋겠다. 조금만 더.
재택근무를 하는 날에도 하루를 일찍 시작하려고 노력한다. 회사 출근을 하지 않는 날에는 12시 전후로 잠들고, 6시 30분에서 7시 30분 사이에 일어난다. 알람을 맞추지 않아도, 해가 뜨면 눈도 떠진다. 창문을 열고 봄바람을 들이고, 반려식물과 인사를 나눈다. 차를 한 잔 마시며, 창 밖으로 보이는 산 조각을 바라본다. 연필을 꺼내 노트에 무언가 끄적이거나 책을 읽는다. 안온하다. 안온함과 대비되는 단어는 출근이다.
2021년 4월 9일. 회사로 출근하는 날이었다. 7시 30분부터 9시 10분까지 로이킴의 <살아가는 거야> 한 곡만 반복해서 듣기로 다짐한다. 9호선 환승 길에 고개를 한 번도 들지 않고 지하철 타는 곳까지 무사히 도착했다. 땅을 보고 걷느라 뛰어가는 사람들과 스칠 뻔했지만, 잘 피했다. 쿵. 쾅. 쿵. 쾅. 발소리에 심장박동수가 미친 듯 빨라졌지만, 동시에 잽싸게 피할 수 있었다. 사람들이 빠르게 지나다니는 환승 길 내가 어디쯤 서있는지 알 수 없을 땐, 휩쓸리지 않고 걸어가는 누군가의 단단한 그림자를 뒤따라갔다. 이거 꿀팁이다. 문제는 도착과 동시에 시작이라는 점.
9호선 급행열차에서 쏟아지는 사람들을 보면 세상이 일렁인다. 그 모습을 보지 않기 위해서 눈을 감고 의자를 찾아 앉는다. 일반 열차를 기다린다. 에어팟으로 세상과 나의 연결을 잠시 끊어냈기에, 지금부터는 눈치싸움이다. 신발이 사라지고, 용기 내 고개를 들고, 지하철에 여유가 보이면 냅따 몸을 던진다. 앉아서 갈 확률은 1%에 가깝다. 눈을 감고, 중심을 잡는다. 볼륨도 조금 더 높이고 나를 보호할 수 희미한 참깨 세상*을 만든다. '앞이 캄캄해서 더 나아가기에 더 힘들어서' 귀에 닿은 가사에 마음을 기댄다. 지금 이 공간에 있는 이들 중 누군가는, 나처럼 아무렇지 않은 척 살아가고 있는지 모른다.
다행이다. 오늘은 운 좋게 앉을자리가 생겼다. 생각도 의식도 마음도 놓아버리자. 푹 자면 좋은 꿈을 꿀지도 모르니까. 어쩌면 진짜 참깨 세상에 도착해서 꿈을 찾을지도 모르니까.
아무런 꿈도 꾸지 않고 내렸다. 22분 일찍 도착했다. 회사 창 밖으로 하염없이 바라본 공원 쪽 출구로 나가볼까, 생각을 실행하는 건 나에게 주는 선물이다. 슬픔을 잊게 만드는 라일락 향기를 맡으며, 이른 등나무 꽃을 바라보다가 호수에 비친 연녹색 그림자를 눈에 담았다. 바닥에 고정된 시선이 소란스러운 봄의 정령을 찾아 분주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라일락 꽃을 엄지손톱만큼 훔쳐 마스크에 쏙 넣었다. 오늘은 봄의 향기로 하루를 버텨봐야지.
*참깨 세상 : <모두와 친구가 되고 싶은 오로르>에 나오는 세상. 특별한 능력이 있는 오로르는 별 하나를 집중해서 보면 '참깨 세상'으로 건너갈 수 있다. 사람들이 바쁘고 지친 '힘든 세상'과 모두가 행복하고 서로룰 도우며 살아가는 '참깨 세상'을 오로르는 오가며 살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