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25. 2차원으로 바라보기; 비의 계절

"딱 한 사람"

by 그리울너머


계절이 바뀔 땐 비가 그 소식을 알리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비가 내리면, 무엇이 사라졌는지 떠올리곤 합니다. 당신에겐 비 오는 날은 어떤가요? 거리에 남아 있던 발자국이 지워지는 순간, 누군가와 나눈 마지막 말이 빗소리에 묻히는 순간, 그런 순간들을 정리해 봅니다. 그렇게 모든 것이 흐려질 때, 그냥 내버려 두는 것도 나쁘지 않습니다.

잊히지 않는 무언가를 정리하는 법. 당신은 어떤가요? 저는 걸음걸이마다 발자국이 사라지는 빗속을 걸어가 봅니다.

"내일, 비가 그치면. 그 맑아진 아침에, 우리, 함께 밥 먹을래요? 어제보다 가벼운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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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내린 건 오랜만이었다. 겨울 내내 단단했던 얼음이 녹아 공기엔 옅은 눈 냄새가 감돌았다. 현관문을 나서는 순간, 나는 딱 한 사람이 되었다. 발끝이 어색하게 뒤뚱이던 찰나, 신발을 고쳐 신었다. 그 순간, 오만 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하지만 오늘은 그냥 두기로 했다. 무겁다면 무거운 대로, 불편하다면 불편한 대로. 너에게 주어진 시간은 짧았지만, 그 자리에 남겨진 공허함은 눈처럼 쌓여갔다. 그래서였을까. 네 흔적보다는 눈의 냄새에 더 깊이 당겨졌다.


비는 그쳤고, 녹지 못한 눈들이 발밑에서 뭉개졌다. 그 차가운 감촉이 마치 질문 같았다. 참, 딱했다.

애꿎은 눈에 화풀이라도 하듯 억척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사각거리는 소리를 내며 눈을 짓이기며 걸었다. 무엇을 버려야 할지 모른다면, 조금 더 걸으면 된다. 그렇게 익숙한 거리에서 길을 잃었다.

시간은 자연스레 흐르고, 오전은 오후로 넘어갔다. 하지만 여전히 걸음은 불편했다. 어쩌면, 박힌 돌 하나를 빼내야 편해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신발을 고쳐 신어도 나아지지 않을 때가 있다. 마음이 제자리에서 드러누웠을 때, 발걸음도 멈춰 섰다. 편하지는 않아도, 익숙해졌다. 그리고 어느새 잊을 만해졌다.

아마도, 시간의 힘이겠지.


한참을 걷고서야 다시 현관문 앞에 섰다. 나는 다시, 딱 한 사람이 되었다. 짧은 시간 동안 긴 시간을 버텨냈다. 새로운 계절이 오면, 기분 전환이 필요하다. 대청소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언제 끝날지는, 누가 알겠어.’




오랜 시간이 지나도 지워지지 않는 것들이 있다.

오랜 시간 내 안을 차지했던 것들.

오랜 시간이 지나도 흐릿해지지 않는 기억들.

함께였던 날의 나.


조용한 밤, 네 심장소리에 귀 기울이며 잠들던 때.

늦은 오후, 부스스한 얼굴로 나를 보며 웃어주던 순간들.

그 모든 것들이 시간이 지나도 공기 속에 녹아 있었다.

가슴 깊이 어디에선가 퍼져 나아갈 때.

그 채워지지 않는 무언가를 추억이라 묻어두고.

혼자 추억하곤 하겠다.

봄날의 따뜻한 촉각, 비 오는 날의 촉촉한 냄새, 가을 낙엽을 지르밟던 감촉.

부서지는 소리에, 기대어야만 했다.

눈 냄새에 가끔은 무너졌다가도.

눈을 짓 녹이며.

이겨내어야만 했다.




오랜만이었다. 이른 아침에 눈을 뜬 것도. 오랜 시간이 지났으니 ‘이젠 괜찮겠지’ 생각했던 것도. 착각이었다.

이른 아침의 공기를 한껏 들이마셨다. 가슴속 깊이 퍼지는 기억들. 오랜 시간이 지나도 지워지지 않는 그것들과 마주했다. 그때는, 그저 함께라서 좋았다.


네 냄새에 이끌려 심장이 뛰던 순간, 늦은 오후, 웃으며 나를 반겨주던 순간, 그 모든 것들이 여전히 공기 속에 남아 있었다. 말 없는 시간들이 가슴속을 떠돌았다. 그저, 추억이라 부르며 혼자 간직하기로 했다. 너를 처음 본 봄날의 따스한 감촉. 우산을 나란히 쓰고 걷던 비 오는 날의 냄새. 해뜨기 전 올랐던 산자락의 낙엽 소리.

그리고, 가끔은 눈 냄새에 무너졌다. 하지만 결국 나는 즈려밟으며 일어나야 했다. 정확히는, 이겨내야 했다.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그 장소, 그 거리에서 언젠가 다시 찾아올 날에, 이른 아침, 눈을 뜨고 낯설지 않은 인사를 건넬게.


“오랜만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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