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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귤예지 Oct 27. 2024

지우와 승호 (3)

승호가 무대를 좋아하는 이유는 하나였다. 무대에서는 무대 밖 세상이 잘 보이지 않는다는 것. 기대에 찬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관객들의 존재를 알지만 의식할 필요는 없었다. 관객들이 관심을 갖는 건 단지 승호의 표정과 목소리,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뿐이니까. 무대라는 특별한 공간은 승호에게 묘한 안정감을 주었다.


승호는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늘 불안을 느끼는 편이었다.

학교에서 꽤 인기가 있다는 걸 스스로도 알았지만 자신을 따르는 아이들 중에 정말로 가깝다고 말할 수 있는 친구가 있는지는 물음표였다. 밖으로 드러나지 않은 내면을 보고도 지금처럼 좋아해줄 사람이 있을지도 자신이 없었다. 가끔은 자신을 추켜세우는 평범한 친구들과 비교하며 자신의 가치에 의심을 품기도 했다.

막이 오르고 무대 가운데 서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후에야 승호는 마음이 놓였다. 이 순간이 오지 않을까봐 얼마나 조마조마했는지 모른다. 손바닥에는 흥건히 땀이 차 있었다.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어쨌든 무대에 섰으니 그만이라며 스스로를 위로했다. 

배역에 몰입하기 위해 눈을 감고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순간 이마의 상처가 따끔거렸다. 가슴에서는 이마보다 더 큰 통증이 묵직하게 느껴졌다. 승호는 통증이 밖으로 드러나지 않도록 입술을 바짝 당기고 첫 대사를 읊었다. 관객석에서 누군가 내뱉는 감탄사가 들렸다. 승호를 향해 쏟아지는 박수와 환호도 들렸다.


“사람 미치게 하는 짓 때려치우고 공부나 해!”


아빠에게 연기는 말 그대로 ‘사람을 미치게 하는 짓’이었다. 엄마가 우울증에 걸린 이유를 아빠는 연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승호가 여섯 살이었을 때, 아빠가 회사에 간 사이 집에 낯선 아주머니 한분이 오셨다. 엄마와 아주머니는 승호를 사이에 두고 앉았다. 엄마 대신 아주머니는 승호에게 밥을 챙겨주고 거실을 청소할 거라고 했다. 그날 엄마 손에는 대본집이 들려 있었다. 엄마는 8년만의 스크린 복귀를 준비하는 중이었다. 막 한글을 뗀 승호에게 상대배역의 대사를 읽어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서로 번갈아 대사를 읽으며 승호는 좀처럼 볼 수 없던 엄마의 밝은 표정을 볼 수 있어 좋았다. 아주머니가 집에 온 날 엄마는 모처럼 즐거워보였다.


하지만 아주머니가 온 건 딱 그날 하루뿐이었다. 아빠는 엄마가 승호를 직접 돌보길 바랐다. 아빠가 스스로 할 수 있는 많은 일을 엄마의 손을 빌려 하듯 승호에게도 엄마가 아주 사소한 것까지 챙겨주길 바랐다. 엄마가 자기 일에 시간과 에너지를 쏟는 만큼 승호에게 결핍이 생길 거라고 아빠는 믿었다. 

몇 번의 크고 작은 사건이 있었고 엄마는 더 이상 대본집을 펼치지 않았다. 딱 그 무렵부터였다. 엄마가 꼭 필요한 말을 할 때 말고는 입을 열지 않은 게.


공부는 엄마에게서 빼앗은 걸 조금이나마 보상하기 위해 고른 도구였다. 승호에게 좋은 성적을 받는 건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공부를 잘해서 생기는 뜻하지 않은 문제가 있었다. 시험점수에 비례해 아빠의 기대가 높아졌다.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직업 가운데 승호가 고를 수 없는 것이 점차 늘어갔다. 배우도 그중 하나였다. 아빠는 경시대회준비반이나 영어토론반이 아니라 연극동아리를 고른 승호를 이해하지 못했다. 아빠는 연극을 사춘기인 승호에게 찾아온 한때의 탈선으로 여겼다.

오늘 아침, 모처럼 가족끼리 저녁식사를 하자는 아빠 말에 승호는 용기를 냈다.


“공연 보시고 저녁 같이 먹으면 어때요?”


벌써 네 번째 공연이지만 아빠를 초대한 건 처음이었다.


“공연?”

“매 학기말 한 번하는 정기공연이에요. 두 분께 보여드리고 싶어요.”


승호는 ‘학기말 한 번’을 강조하며 가방에서 티켓을 꺼냈다.


“네가 무대에 올라가 직접 연기를 한다고?”

“...... 네.”


추궁하는 말투에 승호는 순식간에 작아졌다. 아빠는 티켓을 제대로 들여다보지도 않았다. 괜한 말을 꺼냈다는 후회가 들었다. 어떤 말을 보태도 결말을 바꿀 수는 없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저녁 얘기는 없던 걸로 하자.”


그때였다. 엄마가 보란 듯이 식탁 위로 손을 뻗어 아빠 앞에 놓인 티켓을 집었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아빠가 엄마 손목을 잡았다.


“왜? 직접 가서 응원이라도 하려고?”


엄마가 아빠에게서 벗어나려고 손목을 크게 휘둘렀다. 테이블 가장자리에 얹혀있던 유리컵이 쟁그랑 바닥으로 떨어졌다. 승호는 몸을 굽혀 깨진 유리조각을 모았다. 잠시 후 몸을 일으키는 순간이었다.


“당신 닮아 쟤까지 미쳤으면 좋겠어?”


엄마를 향한 아빠의 분노. 동시에 이마에 날카로운 통증이 부딪혔다. 눈썹 언저리에서 시작한 뜨거운 액체가 볼을 타고 흐르는 게 느껴졌다.


동아리원들은 상처를 보자마자 호들갑을 떨었다. 대부분 걱정하는 반응이었지만 승호는 마음이 복잡했다. 관객들의 관심을 모으고도 남을 크기의 상처였다. 상처가 돋보이는 희고 매끈한 피부조차 원망스러울 지경이었다. 반년 간 준비한 공연을 상처 때문에 망치고 싶지는 않았다.

공연 직전 도착한 모자는 그야말로 기적 같은 선물이었다. 

모자로 상처를 가리고 무대에 올라서며 승호는 마음을 다잡았다. 이마의 상처와 마찬가지로 마음의 상처도 밖으로 드러나지 않게 꽁꽁 숨겨야만 한다고. 자신이 누군지는 잠시 잊고 맡은 배역과 하나가 되기 위해 숨을 모았다. 다행히 공연이 진행될수록 아침에 있었던 일은 아득해졌다.

마침내 마지막 대사가 끝났다.


‘끝이다. 올해의 마지막 공연. 어쩌면 내 인생의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관객석을 가득 채운 사람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승호에게 박수를 보냈다. 

승호는 가슴이 뭉클해졌다.


‘고마워. 정말 고마워요. 이렇게 많이 와줘서.’


무대를 향하던 조명이 공연장 전체로 옮겨갔다. 승호는 관객석에 아빠가 없다는 걸 바로 알아차렸다. 서운함과 동시에 안도하는 마음이 들었다. 관객석에는 엄마도 없었다. 집에서 혹시 또 무슨 일이 있었을까. 불안함과 동시에 외면하고 싶은 마음도 들었다.


‘결국 또 혼자네.’


공연 덕분에 잊고 있던 집에서의 시간이 다시 떠오르기 시작했다. 승호의 뺨을 타고 눈물이 흘렀다. 눈물의 의미를 모르는 관객들은 감격스러운 표정으로 환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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