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귤예지 Oct 27. 2024

지우와 승호 (6)

승호선배는 점심시간이 끝날 무렵 지우네 교실에 왔다. 선배가 나타나자 2학년 복도 전체가 술렁였지만 막상 지우네 교실에 들어오자 언제 그랬냐는 듯 모두 숨을 죽였다. 반애들은 선배의 발길이 향하는 곳으로 시선을 모았다. 선배의 목적지에 누가 있든 잔뜩 부러워할 준비가 된 눈빛들이었다.

지우가 그 눈빛들을 직접 본 건 아니었다. 점심시간이 끝나는 종이 울리고 나서야 지우는 교실로 돌아왔고 책상 위에 가지런히 놓인 회색비니를 발견했다. 선배가 교실에 올 거라는 건 지우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지난밤 모자를 가져다줄 거라는 선배의 생각데이터를 이미 확인한 지우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예정된 시간이 다가올수록 지우는 불안했다. 사실 지우의 불안은 지난밤, 선배의 마지막 생각데이터를 확인한 순간부터 시작되었다.


가까워지고 싶다니.

선배를 처음 본 순간부터 간절히 바라던 상황이었다. 지우네 학교 여학생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꿈꿨을 일이기도 했다. 지우는 선배와 우연히 눈이 마주친 날이면 너무 설레어서 쉽게 잠들지도 못했다.

오랫동안 좋아해온 선배와 드디어 가까워질 수 있는 기회인데, 도대체 왜 불안하고 혼란스러울까. 선배가 올 걸 눈치챘으면서 왜 일부러 자리를 피했을까. 지우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마음이었다.

며칠이 지나고 지우는 선배와 급식실에서 우연히 마주쳤다. 선배가 반가운 얼굴로 먼저 다가왔지만 지우는 엉뚱한 핑계를 대며 자리를 피하고 말았다. 지우는 자신도 알 수 없는 이유로 선배와의 만남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지우는 학교를 마치고 집에 도착하자마자 책가방을 열었다. 깊숙이 손을 넣자 손끝에 보드라운 털실의 감촉이 느껴졌다. 며칠째 커다란 비밀을 대하듯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스스로도 다시 꺼내길 주저하며 꽁꽁 숨겨둔 모자였다. 오늘은 꼭 모자가게를 찾아가 돌려줘야지, 하면서도 막상 모자에 비밀이 잔뜩 묻어있을 것 같아 선뜻 돌려주지 못한 모자였다. 지우는 눈을 질끈 감고 모자를 머리에 썼다.


- 너랑 가까워지고 싶다고.


서른 번도 넘게 읽은 메시지를 곱씹으며, 지우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대체 왜 이래? 너야말로 선배랑 가까워지고 싶었으면서.’


휴대폰이 울렸다. 

방금 스스로에게 던진 질문이 휴대폰으로 옮겨 와 있었다. 그리고 이어진 메시지.


- 근데 그게 진심이긴 했을까?


‘진심이 아니면? 난 선배가 좋아서 연극동아리에도 들어갔어.’


- 선배와 친해지고 싶었던 거지. 선배를 좋아해서가 아니었는지도 몰라.


지우는 진실의 거울이라도 마주한 것처럼 몸을 휴대폰 가까이 당겨 앉았다.


‘뭐가 달라? 좋아하는 거랑 친해지고 싶은 게.’


- 넌 선배 인기에 끌린 거야. 선배랑 친해지면 덩달아 괜찮은 사람이 될 것 같아서. 사실은 선배가 어떤 사람인지도 잘 몰랐잖아.


순간 모자를 벗어버리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지우는 가방 깊숙이 숨겨뒀던 모자처럼 마음 깊숙이 꽁꽁 감춰져있던 자신의 진심과 마주하고 있었다.


‘말도 안 돼. 그런 마음으로 누군가를 좋아하진 않아.’


- 그럼 선배를 만나. 그리고 너도 선배랑 가까워지고 싶었다고 말해.


‘하지만 그건......’


- 네 부족한 부분들을 선배가 채워줄 수 있을 거라 생각한 거 아냐? 선배랑 같이 있으면 다들 부러워할 테고 스스로도 꽤 잘 나가는 애처럼 여겨질 것 같았던 거잖아.


지우는 뜨끔했다. 아니라고 대꾸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상대는 지우 자신이었다. 전송된 메시지는 모른 척 외면해온 진짜 마음이었다.

선배를 그저 멋있다는 이유로 좋아하기 시작한 게 사실이었다. 멋있다는 것도 친구들이 그렇다니까 그런 줄 알았다. 사실 지우는 선배에 대해 아는 것도 별로 없었다. 선배가 평소에 어떤 생각을 하는지, 어떤 말투를 쓰는지도 이번에야 알았다.


- 근데 막상 선배가 친해지고 싶다니까 겁도 나지? 별 볼 일 없는 널 선배가 아무 이유 없이 좋아하게 됐을 리 없으니까. 왠지 다 이 모자 때문인 것 같은 생각도 들지? 


액정 위에 눈물이 톡 떨어졌다. 여기저기 흩어져있던 마음의 조각들이 대화창으로 옮겨왔다. 지우가 선배의 마음을 알고도 주저했던 이유, 선배를 마주칠 까봐 두려웠던 이유가 다 거기에 있었다.

곱슬머리나 울긋불긋한 피부, 소심한 성격 같은 건 선배와 가까워진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선배가 아닌 다른 누가 와도 해결해줄 수 없는 문제였다.


그날 밤 지우는 자신과 긴 대화를 주고받았다. 대화 초반에는 전보다 더 초라해진 기분이 들었다. 내세울 것 없는 외모와 성격에 이제 남의 생각을 몰래 훔쳐봤다는 죄책감까지 더해졌다. 이런 실체를 알고도 선배가 여전히 지우와 가까워지고 싶어 할까.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대화가 길어질수록 적어도 머리 하나는 가벼워졌다. 마치 긴 일기를 쓰고 난 후처럼 마음도 훨씬 가뿐했다. 텍스트로 옮겨진 마음들이 이정표가 되어 지우가 어디로 가야할지를 알려주었다. 


지우는 용기를 내기로 했다. 선배에게 모든 걸 털어놓고 사과하기로. 선배가 지우에게 실망해 전보다 더 멀어지더라도, 아주 불편한 사이가 되어버리더라도, 그것조차 감당해야 한다는 게 자신과의 긴 대화 끝에 내린 결론이었다. 그게 선배와 친해지는 것보다 지우 자신을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어줄 행동이라는 걸 마침내 깨달았다.

어느새 아침이 밝아오고 있었다. 지우는 모자를 벗어 다시 가방에 넣었다.

지우 자신도 모자도 원래 있어야 할 자리로 돌려놓아야겠다고 다짐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