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실에서 나오자마자 주방으로 향하던 그녀와 딱 마주치고 말았다.
“일어났구나.”
못 본 채 지나가도 되는데 꼭 한마디씩 말을 건다.
“밥 차려줄까?”
진짜 챙겨주고 싶은 마음도 없으면서 왜 묻는 걸까? 생계를 함께하는 미성년자에 대해 최소한의 책임은 다하는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납득시키고 싶은 걸까? 그게 아니면 다른 사람들 시선이 신경 쓰여서?
“약속 있어요.”
“누구랑?”
“친구요.”
당연히 거짓말이다. 아빠가 죽고 내게서 사라진 건 아빠만이 아니었다. 장례가 끝나고 일주일 만에 학교에 갔을 때 아이들은 내게서 훌쩍 멀어져 있었다. 좀처럼 말을 거는 일이 없었고 어쩌다 내 앞에서 웃음이라도 터져 나오면 큰 잘못이라도 저지른 것처럼 자기들끼리 눈빛을 교환하며 동동거렸다.
동정어린 눈빛, 짐짓 가다듬은 목소리, 거르고 걸러 껍데기만 남은 대화…….
보이지 않는 벽이 나와 친구들 사이를 나누고 있었다.
내가 불쌍해서? 아니면 엄마도 없는데다 이제 아빠까지 없는 애랑은 놀지 말라고 부모님들이 시키기라도 했나? 어느 쪽이든 하나는 분명했다. 전처럼 평범한 고등학생으로 살아가기는 어려워졌다는 사실.
그깟 약속, 만들면 그만이지.
도서관에 있다던 강태경은 떡볶이를 사준다고 했더니 5분 만에 달려 나왔다. 하여간 먹는 거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강태경이다.
강태경은 키오스크 장바구니에 떡볶이 2인분을 담고도 사이드메뉴 쪽을 기웃거렸다.
“주먹밥? 튀김? 뭐 더 먹을래?”
“꼭 네가 사주는 것처럼 말한다?”
“후후. 둘 다 시켜?”
“그러든지.”
평소라면 눈을 흘기며 강태경의 넘치는 식욕을 자제시켰겠지만 오늘은 조금 너그러워지기로 했다. 도서관에서 제대로 공부를 하고 있었는지는 의심스럽지만 어쨌든 내가 방해를 한 셈이니까.
“참, 그 손님은 어떻게 됐어?”
강태경이 튀김 하나를 떡볶이 소스에 푹 찍어 우물거리며 물었다.
“무슨 손님?”
“왜 있잖아. 모자 도둑.”
“도둑은 아니고.”
“언제는 자기가 도둑이라더니?”
“다시 찾아왔더라. 모자 돌려주러.”
손님은 교복을 입고 왔다. 내가 손님이 다닐 거라고 예상했던 바로 그 학교의 교복이었다. jini_03 폴더로 전송된 생각데이터 덕분에 난 손님에 대해 꽤 많은 걸 알았다. 그날 손님이 모자를 돌려주러 올 거란 것도.
손님은 설명도 제대로 듣지 않고 성급히 모자를 가져가서 미안하다고 했다. 뒤늦게 가져온 것에 대해서도 사과했다. 무엇보다 테스트 방법을 몰라 제대로 참여하지 못했다며 모자 가격만큼 돈을 내겠다고 했다. 그 말을 할 때 손님의 말투에는 진심이 담겨있었고 나는 그 모습이 꽤 예뻐 보였다. 말투뿐 아니라 동그란 얼굴과 한쪽 볼에 팬 보조개, 파마머리 못지않은 곱슬머리도 매력적이었다. 그러니까 모자의 첫 번째 사용자였던 선배가 얼마나 멋지고 대단한 사람인지 몰라도, 손님과 가까워지고 싶어 했다는 건 전혀 놀랄 일이 아니었다.
손님이 돌아간 후에 나는 jini_03 폴더에 들어있던 데이터는 몽땅 삭제했다. 테스트가 끝난 모자의 데이터는 완전히 삭제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너희 가게 모자, 나도 써 볼 수 있어?”
입에 주먹밥 하나를 물고 강태경이 불쑥 물었다.
“갑자기 왜?”
가게를 찾는 손님들에게 묻고 싶은 질문이기도 했다. 자기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가장 잘 아는 건 자기 자신일 텐데 마음을 읽는 모자가 왜 필요할까.
“왜긴 왜야. 마음을 알고 싶어서지.”
“네 마음을 네가 모르면 누가 알아?”
“가끔 헷갈리지 않아? 내가 진짜 하고 싶은 게 뭔지. 제일 좋아하는 게 뭔지.”
“그거야 곰곰이 생각하다보면 되지 않아?”
“모자가 생각을 메시지로 보내준다며. 생각은 어디로든 흘러가지만 메시지는 휴대폰에 남잖아.”
“그게 뭐?”
“뭐라니? 그게 곧 흘러가는 생각을 붙잡아주는 거니까. 꼬리에 꼬리를 무는 대화를 자기 자신과 나눌 수 있겠지. 그렇게 생각이 점점 뻗어가다 보면 질문에 대한 답이 나올 수도 있고.”
jini_03 폴더로 전송된 생각데이터를 떠올렸다. 조금 이해가 되는 것도 같았다.
“그리고 그보다 더 큰 이유는......”
강태경의 목소리가 갑자기 진지해졌다. 둘 중 하나다. 무거워지거나 한없이 가벼워지거나.
“...... 재밌잖아.”
후자다.
“얼마나 신기해.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일이 현실에서 가능하다는 게. 너희 사장님은 어떻게 그런 모자를 만들 생각을 하셨대?”
“그거야 나도 모르지.”
연구일지에도 모자를 발명한 이유는 적혀있지 않았다. 처음에는 사장님이 뇌를 연구하는 어느 대기업의 연구원은 아닐까 생각했지만, 대기업이 엘리베이터도 없는 허름한 상가건물 옥상에 가게를 뒀을 리는 없었다. 그렇다면 한때 대기업에 있다가 쫓겨난 연구원? 자기를 쫓아낸 회사에 복수라도 하려고 내부기술을 유출해 몰래 모자를 개발하는 거라면 말이 될까.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냐?”
바짝 얼굴을 들이대고 염탐하듯 묻는 강태경 목소리에 번뜩 정신이 들었다.
“아무것도 아냐.”
“혹시 너희 사장님한테도 너 같은 딸이 있는 거 아냐?”
“왜?”
“딸이 말을 잘 안 해주고 아무것도 아니라고만 하니까, 그 속이 궁금해서 모자를 만든 걸지도 모르잖아.”
나는 조금 머뭇거리다 말을 이었다.
“그런 느낌은 안 들어.”
“무슨 느낌?”
“...... 가족이 있다는 느낌.”
“그런 느낌이 따로 있냐?”
“있지 않나.”
너한테도 있어.
나는 속으로만 말했다.
나한테는 이제 없겠지만.
이 말도 속으로만 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떡볶이 접시가 깨끗하게 비워져있다. 튀김과 주먹밥도 마찬가지다. 강태경이 보란 듯이 마지막 떡 한 점을 입에 넣고 우물우물 씹으며 히죽댔다.
강태경의 머리에 모자를 씌우는 상상을 했다. 갑자기 더럭 겁이 났다.
- 애는 이제 어떻게 되는 거야?
몰랐다면 나았을 가까운 사람의 진심.
아빠 다음으로 친하다고 생각했던 삼촌과 고모였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들었다는 걸 들키는 순간 나는 더 불쌍한 애가 될 것 같아서 잠에서 깨고도 한참동안 눈을 감고 있었다.
돈을 벌기로 다짐한 건 그때부터였다. 내가 직접 벌어서 혼자서도 잘 먹고 잘 살기로 마음먹었다. 삼촌과 고모 말처럼 어떻게 ‘되’는 게 아니라 어떻게 ‘할’ 수도 있다는 걸 보여주기로. 등 떠밀려 나를 떠맡게 된 사람을 놔주려면 일단 혼자 살 방부터 구해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