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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귤예지 Oct 27. 2024

은경과 기봉 (1)

꾹 다문 팀장의 입을 보며 은경은 속이 끓었다. 벌써 20분 째 팀장은 말 한마디 없이 은경의 기획서를 노려보는 중이었다.

“팀장님!”

“어? 그래. 주과장.”

“뭐가 문젠지 차라리 말을 해주세요.”

“무, 문제? 없어, 그런 거......”

문제가 없을 리 없었다. 방금도 한숨을 푹 내쉬다 은경이 부르자 화들짝 놀랐으면서. 팀장은 요즘 은경이 보고를 할 때마다 미간을 찌푸렸다. 은경이 쓴 기획서에 상당한 불만을 품고 있는 게 분명했다.


입사 12년차, 은경은 나름 업무능력으로 인정받는 회사원이었다. 이번 팀에 온 것도 팀장이 다른 팀에 소속된 은경을 스카우트해서였다. 팀장과는 은경이 신입사원일 때 함께 근무했다. 당시 과장이었던 팀장은 기획서의 신으로 불릴 정도로 유능한 선배였다. 팀장은 문제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거기에 맞는 뾰족한 해결책을 집어내는 능력이 탁월했다. 그렇게 집어낸 해결책을 간결한 문장으로 정리하는 것 또한 팀장의 특기였다. 업무능력에서부터 성실하고 꾸준한 태도까지, 은경은 회사생활에 필요한 건 모두 팀장에게 배운 셈이었다.

직장생활의 교과서나 다름없는 팀장의 불만 가득한 반응에 은경은 요즘 마음이 불편했다. 팀장은 혹시 자신을 스카우트한 걸 후회하고 있지는 않을까.


어디가 잘못됐는지 시원하게 말해주면 팀장이 원하는 대로 고칠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뭐가 문제인지 물을 때마다 팀장은 입을 꾹 다물고 딴청을 피웠다. 그런 태도마저도 은경은 마음에 걸렸다. 팀장이 얼마나 배려심 많은 사람인지 은경이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다. 팀장은 신입사원이던 은경의 크고 작은 실수를 다른 사람들 모르게 조용히 수습해준 선배였다.

이번에도 팀장은 은경이 상처받을 게 걱정되어 배려하는 중일까. 그게 아니면 싫은 소리로 은경과 서먹해질 위험을 감수하느니 한숨이 나오더라도 자기가 은경의 몫까지 해내고 말겠다는 걸까. 그것도 아니면 팀장에게 자신은 이미 고칠 수도 없는 구제불능인 걸까?

은경은 자존심이 상했다. 은경은 더 이상 신입이 아니었다. 자신의 업무에 문제가 있다면 해결 또한 직접 해야 했다. 무엇보다 은경은 얼른 이 답답한 상황을 벗어나고 싶었다. 할 수만 있다면 팀장의 머릿속에라도 들어가 보고 싶었다. 팀장의 불만이 뭔지, 그에게 인정받으려면 어떤 노력을 해야 할지 궁금했다.


모자 얘기를 들은 건 회식자리에서였다. 신입 은지수사원의 말에 따르면 그 특별한 모자는 사용자의 생각을 텍스트로 바꿔 휴대폰으로 전송해준다고 했다. 회식에 참석했던 직원 대부분이 세상에 그런 모자가 어디 있느냐고 웃어넘겼지만 지수사원은 꽤 진지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자신의 친동생이 직접 그 모자를 써봤다면서.

은경은 지수사원에게 모자가게 위치를 물어두었다. 마침 가게는 회식장소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다음날 점심시간, 은경은 팀장을 모자가게로 데려갔다.

마스크를 쓴 중년의 사장님은 모자의 특별한 기능을 안내하며 지금은 테스트 기간이라는 말을 덧붙였다. 사장님이 별다른 감정의 동요 없이 차근차근 해주는 설명을 듣고 나니 은경은 모자에 더욱 신뢰가 갔다. 은경은 꽤 고심해서 팀장의 얼굴형에 어울리는 베이지색 헌팅캡을 골랐다. 연유야 어떻든 은경이 팀장에게 주는 첫 선물이었다. 


건물에서 나와 모자가게로부터 한참 멀어지자 팀장이 모처럼 재미난 일을 만났다는 듯 싱겁게 웃었다. 지수사원이야 신입사원이니 그럴 수 있다 쳐도 마케팅 업무 12년차인 은경이 마음을 읽는 모자 얘기를 믿는 게 우습단 거였다. ‘산소 같은 여자’가 진짜 산소가 아니고 ‘침대는 가구가 아니’라고 해서 가구가 아닌 게 아니듯 ‘마음을 읽는 모자’라는 건 단지 마케팅에서 흔히 쓰이는 은유적 표현일 뿐인 걸 모르냐면서. ‘테스트 기간’이라는 것도 마케팅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한 그럴듯한 장치에 불과하다는 거였다.

밑져야 본전이었다. 다행히 팀장은 모자의 디자인만큼은 꽤 마음에 들어 하는 눈치였다. 내친김에 은경은 보고를 받을 때마다 모자를 쓰겠다는 팀장의 약속까지 받아냈다.


마침내 은경이 며칠 밤을 새워 작성한 기획서를 보고할 순간이 왔다. 팀장은 역시나 입술을 꾹 다물고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오늘은 눈까지 찡그리고 있어 기획안을 제대로 보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은경은 비로소 모자를 꺼낼 때라는 생각이 들었다. 모자에 부착되어 있던 큐알코드는 일찌감치 은경의 휴대폰으로 인식해두었다.


“모자는요?”

“모자?”

“보고 받을 때마다 쓰기로 하셨잖아요.”


억지로 받아낸 약속이라도 약속은 약속이었다. 

팀장은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니라는 듯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두 번째 서랍에서 모자를 발견하고 순순히 집어 썼다. 은경의 심장은 쿵쾅거렸다. 업무평가 결과를 앞에 둔 심정이었다. 

지수사원의 말은 사실이었다. 팀장이 모자를 쓰자마자 은경의 휴대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전송된 메시지의 내용이 이상했다.


- 모기 

- 모기

- 모기, 모기, 모기, 모기......


기획서를 본 팀장의 머리에서 나온 메시지가 ‘모기’라니. 이어서 몇 개의 문장이 더 전송되었지만 ‘모기’에서 발전되었다고 보기는 어려운 내용이었다.

은경은 의심스러운 눈으로 팀장의 표정을 살폈다. 팀장은 여전히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


‘밤새 수정한 게 겨우 이거야?’


팀장의 표정대로라면 이런 메시지가 전송되어야 마땅했다.


‘말한다고 쉽게 고쳐질 것 같지도 않은데, 휴, 그냥 내가 하고 말지.’


아니면 이런 메시지.

뭐가 됐든 ‘모기’가 등장할 타이밍이 아닌 건 분명했다.

팀장의 말대로 ‘마음을 읽는 모자’라는 건 마케팅을 위한 은유적인 표현이었을까? 마음을 읽지도 못하면서 읽는 척, 아이들 장난감처럼 엉터리 문장 몇 개를 랜덤으로 전송하는 건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이건 고객에 대한 기만이다.


퇴근 후, 은경은 솟구치는 화를 참지 못하고 다시 가게를 찾아갔다.

지난번에 본 사장님 대신 고등학생 정도로 보이는 직원이 있었다. 은경은 당장 사장님을 불러달라고 소리치고 싶은 걸 애써 참았다. 짐짓 어른스러운 태도로 손님을 대하려 애쓰는 어린 직원의 자존심까지 뭉개고 싶진 않았다.


“다른 모자로 교환해주세요.”


정말로 교환을 기대하고 꺼낸 말은 아니었다. 팀장이 쓴 모자에는 이미 담배냄새가 잔뜩 배어버렸으니까. 보고를 받으며 한숨을 내쉬다가 말도 없이 밖으로 나가버리는 건 요즘 생긴 팀장의 습관이었다. 잠시 후 돌아온 팀장에게서는 머리카락이며 옷이며 담배냄새가 잔뜩 묻어있었다.

직원은 뜻밖의 침착한 태도로 노트북 맞은편에 은경을 앉혔다. 직원이 암호화된 폴더를 프로그램에 넣자 비어있던 창에 텍스트가 나타났다. 제법 그럴듯해 보이는 프로그램이었지만 출력된 텍스트의 내용을 들여다보니 은경은 다시 속이 부글거렸다.


“이것 보세요. 같은 메시지가 반복되잖아요. 여기도, 또 여기도.”

“손님, 우선 사용자가 처한 상황과 맥락을 먼저 알아야......”

“전혀요. 저런 단어가 전혀 떠오를 수 없는 상황이었어요. 팀장님이 모자를 쓰고 있던 곳은 회의실이었다고요. 우린 회의 중이었어요!”


이번만큼은 직원도 침착한 대처법을 찾기 어려운 모양이었다. 당연했다. 여름도 아니고 겨울에, 집도 아닌 회사에서, 누군가의 머릿속에 들어있는 생각이 온통 ‘모기’뿐인 걸, 모자에 문제가 있다는 것 말고 달리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공짜로 얻은 모자가 엉터리라는 게 이 정도로 화날 일은 아니었다. 세상에는 더 심각한 문제를 일으키는 물건도 차고 넘친다는 걸 마케터인 은경은 알았다. 은경이 화나는 진짜 이유는 팀장의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겠다던 기대가 와르르 무너졌기 때문이었다.


“모자에는 문제가 없습니다.”


어느새 가게에 들어온 누군가가 말했다. 지난번 만난 사장님이었다.


“기계는 거짓말을 하지 않거든요.”


확신에 찬 말투였다. 바닥까지 떨어진 기대를 다시 끌어올리며, 은경이 물었다.


“그럼 저 화면 속 ‘모기’들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죠? 팀장님은 식품에 대한 마케팅 전략 기획서를 보고 받는 중이었어요.”

“‘아웃포커싱’이라고 들어보셨나요?”

“‘아웃포커싱’이요?”

“사진 촬영에 쓰는 하나의 기법이죠. 피사체에 초점을 맞춰 배경을 흐리게 하는.”

“그게 이 모자랑 무슨 상관인데요?”

“뇌도 비슷해요. 한 가지 생각에 지나치게 몰두하면 다른 생각이 끼어들지 못하는 상태가 되죠. 그런 경험 없으세요? 다른 쪽으로 관심을 돌려보려고 애써도 계속 한쪽으로만 생각이 쏠리는 경험. 아무리 몸부림쳐도 어떤 생각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어 괴로웠던 적, 없으신가요?”


은경에게는 지금이 그런 때였다. 자신에 대한 팀장의 불만은 도대체 뭘까? 왜 그걸 말해주지 않을까? 머릿속이 온통 그런 생각으로만 가득했다. 이건 어떤 프로젝트보다 먼저 해결해야 할 중요한 과제였다. 이 과제를 풀어야 다른 과제도 풀 수 있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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