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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귤예지 Oct 27. 2024

은경과 기봉 (3)

“말이 돼요?”

은경이 발끈했다.

“겨울이잖아요. 모기가 다니는 게 말이 되냐고요.”

팀장은 대답 대신 소매를 걷어 보였다. 오른쪽 팔목과 팔꿈치 사이에 모기 물린 흔적이 아홉 군데나 있었다. 붉게 부어오른 정도로 보아 모두 최근에 물린 자국이었다.

“와, 요즘 모기들 근성 있네. 이렇게 날이 추운데?”

은경의 격한 반응에 팀장이 풉 웃었다. 은경이 원래의 씩씩하고 당찬 모습으로 돌아와서 이제야 마음이 놓인다는 표정이었다. 

다행인 건 은경도 마찬가지였다. 조금 전 모자를 앞에 두고 난처해하는 팀장의 태도에 은경은 잔뜩 주눅이 들었다. 은경에게 들켜선 안 될 마음이 있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자신이 상처받을 걸 염려해 팀장이 본심을 숨기고 있다고 생각했다. 자존심이 상해서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이를 악물고 참았지만 결국 눈물 한 줄기가 삐져나와버렸다. 팀장은 당황하며 은경을 사무실 밖 회의실로 불러냈다. 모자는 여전히 쓰지 않은 채였다.

단둘이 마주 앉아서도 은경의 감정은 쉽사리 가라앉지 않았다. 팀장이 무슨 말을 해도 믿을 자신이 없었다. 팀장은 자존심 센 은경의 성격을 잘 아는 사람이었다. 그런 은경을 앞에 두고 솔직하게 불만을 털어놓을 리 없었다. 그러니까 모자도 옆으로 치워버린 거겠지. 

이렇게 된 이상 팀장이 이 상황을 넘기려고 어떤 거짓말을 풀어놓든 눈 질끈 감고 믿는 척 넘어가주자고 마음먹었다. 남은 자존심이라도 지키려면 그 수밖에 없어보였다.


그런데 모기라니, 모기 때문이었다니.

팀장이 처음부터 집값이 떨어져서 정신이 딴 데 있었다고 둘러댔다면 은경은 역시나 거짓말이라며 믿지 못했을 거였다. 하지만 모기 이야기는 아무래도 황당했다. 너무 뜻밖이라 오히려 거짓말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은경이 아는 팀장은 꼼꼼하고 성실한 기획자였지만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은 아니었다. 실현가능성 따위 고려하지 않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던지는 쪽은 언제나 은경과 후배들이었다. 게다가 팀장은 이런 이야기를 순식간에 지어낼 정도로 순발력이 뛰어난 사람도 아니었다. 그러니까 모자를 씌우지 않아도 팀장이 솔직하게 말하고 있다는 걸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몇 년 치 체증이 통째로 날아간 듯했다. 은경의 문제는 해결되었으니 이제 팀장의 문제를 해결할 차례다.

“아무리 생각해도 카페에 올라온 글은 억지 같아요. 몇 억짜리 아파트 가격이 겨우 모기 때문에 떨어지다뇨? 그 사람 혹시 사기꾼 아니에요? 집값 떨어뜨려 매입한 후에 다시 올려 되파는 사람들, 기사로 본 적 있어요!”

“나도 처음에는 의심했어. 근데 그 사람, 알고 보니 유튜브에서 강의도 하고 신문에 기고도 하는 전문가더라고. 부동산 전문가. 그 사람 글에서 본 대로 그 후로도 우리 아파트 값만 계속 떨어지고 있다니까.”

팀장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주과장, 아파트 이름에 프라임, 퍼스트, 프레스티지 어쩌고 붙은 거 많이 봤지?”

“그럼요. 저희 집도 원래 무지개아파트였는데 재작년에 바뀌었어요. 레인보우밸리오투로. 아니다, 레인보우오투밸리였나, 아무튼.”

“그래. 요즘 아파트 이름이 다 요상하잖아. 그렇게 바꾸는 이유가 결국은 이미지 때문이거든. 고급스러운 이미지를 만들어서 가격을 올리려는 거지. 근데 우리 아파트는 멀쩡한 이름을 두고도 뭐라고 불리는지 알아?”“뭐라 불리는데요?”

“모기아파트.”

“에이, 설마요.”

“진짜라니까? 별명이 모기아파트인줄 알았으면 무리해서 안 샀을 거야. 나도 이런데 누가 살고 싶겠어. 휴, 집값 더 떨어지면 은행에서 연락이 올 거야. 대출 빨리 갚으라고. 나 이제 어떡하냐? 있는 돈 없는 돈 몽땅 끌어다 산 아파트거든. 퇴직금까지 다 끌어 썼어. 은경아, 나 진짜 어쩌면 좋냐?”

팀장이 ‘은경’이라는 이름으로 부른 건 처음이었다. 모두가 자기를 ‘은경아’, ‘은경씨’라고 부르던 막내시절에도 팀장은 유일하게 ‘주사원’이라는 직위로 불렀다. 꽤 친해진 후에도 꼬박꼬박 ‘주대리’, ‘주과장’이라는 직위로 불러줬고 그게 존중하는 표현처럼 들려 고마웠다. 

그런데 지금, 팀장이 절박한 목소리로 부른 이름도 나쁘게 들리지 않았다. 마음이 다칠 걸 염려해 불만을 털어놓지도 못하는 후배였던 자신이 불과 몇 분 사이 개인적인 고민을 털어놓을 만큼 믿음직한 동료로 승격한 기분이었다. 은경의 남다른 책임감이 꿈틀댔다.


“어쩌긴 뭘 어째요. 팀장님 단골멘트 있잖아요.”

“내 단골멘트?”

“새 프로젝트 시작할 때마다 하시던 말씀, 기억 안 나세요?”

“그, 그런 게 있었나?”

은경의 회사는 기업의 문제를 해결해주는 일을 했다. 잘 나가던 매출이 반토막 난 고객사, 이미 경쟁이 치열한 시장에 신규로 진입하는 고객사, 2세 경영자가 악성루머에 휘말려 불매운동 타깃이 되어버린 고객사까지, 도무지 해결할 수 없을 듯한 문제를 앞에 두고 팀장이 늘 하던 말을 오늘은 은경이 흉내냈다.

“자자, 긴장들 풀자고. 문제가 있으면 뭐도 있다?”

팀장이 희미하게 웃었다. 이어질 말을 누구보다 잘 알지만 이번에도 통할지는 자신이 없는 표정이었다.

“표정이 왜 그래요? 문제가 있으면 해결책도 있다! 팀장님 단골멘트잖아요.”

“그거야 회사에서나 통하는 말이지. 아파트 전체에 모기가 쫙 깔렸어. 이런 문제에 해결책이랄 게 어디 있겠어......”

팀장이 말끝을 흐렸다.

“와, 이런 약한 모습이라니. 정신적 지주께서 흔들리시면 우리는 이제 누구한테 기대죠?”

“정신적 지주?”

“그럼요. 팀장님이 우리 팀 정신적 지주시잖아요.”

“내가 무슨. 하는 일이라고는 가만히 앉아서 고개나 끄덕이는 게 전부인데. 그마저도 요즘은 제대로 못해서 주과장 앞에 이러고 앉아있고.”

“가만히 앉아서 고개 끄덕이시는 거. 그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데요.”

조금은 기대하는 표정으로 팀장이 고개를 들었다.

“그게, 중요한 일이라고?”

“그럼요. 팀장님이 고개를 끄덕이시는 게 팀원들에게는 ‘잘 듣고 있다, 계속 얘기해보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지거든요. 덕분에 말이 안 되는 아이디어도 팀장님 앞에서는 편하게 꺼낼 수 있는 거죠. 게다가 말이 되게 만들어주시니까.”

“내가?”

“모르세요? 팀장님 별명?”

“......”

“다들 팀장님 ‘거름망’이라고 부르잖아요. 엑기스만 딱, 걸러주신다고.”

“거름망이 그런 뜻이었어?”

“그럼요. 우리 팀 최근 경쟁PT에서 이긴 기획안들도 다 팀장님 거름망 통과한 것들이잖아요.”

“그거야 팀원들이 잘한 덕분이지. J라면 건은 정대리 아이디어였고, D통신사 건도 신입 아이디어에 주과장이 살을 붙였잖아.”

“회의 때 나온 백 개 넘는 아이디어 중에서 그 둘이 딱 남게 걸러주신 건 팀장님이고요.”

“그거야 나도 잘 모르니까, 될 놈인지 안 될 놈인지 판단이 안 서니까 자꾸 묻고 또 묻고 했던 것뿐인데......”

“팀장님 질문에 답하는 과정에서 안 될 아이디어는 저절로 걸러진 거예요. 게다가 이건 이렇게 발전시키면 좋겠다, 저건 방향을 이쪽으로 틀어보자, 하면서 문제 해결을 위해 낸 아이디어의 문제들마저 해결해주신 분도 팀장님이시고. 이쯤 되면 인정하세요. 스스로가 대단한 분이라는 거.”

팀장이 동그랗게 만 손가락으로 턱을 문질렀다. 민망할 때마다 나오는 습관이었다.


“자, 그럼 오늘의 문제를 먼저 정의해볼까요?”

은경은 벌떡 일어나 회의실 앞 화이트보드로 다가갔다.

‘모기’

풋. 화이트보드 가운데 은경이 막 적은 단어를 보고 팀장이 웃었다. 회의 때마다 자신이 하던 행동을 은경이 따라하고 있었다.

“먼저 문제의 원인부터 파악해야겠죠? 팀장님 아파트에는 왜 모기가 많을까요?”

은경이 사뭇 진지한 태도로 물었다. 장난기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얼굴이었다. 팀장도 덩달아 진지해졌다. 그간 문제에 대해서만 생각했지 그 원인에 대해서는 제대로 고민한 적이 없었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자신을 괴롭히던 모기와의 전쟁에 어쩌면 해결책이 있을 수도 있겠다는 희망이 어렴풋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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