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귤예지 Oct 27. 2024

눈치게임

아빠 옆에 누군가 있다는 걸 눈치 챈 건 그녀를 소개받기 훨씬 전부터였다. 패션감각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던 아빠가 어느 날부터 옷을 제대로 갖춰 입기 시작했다. 내가 첫 생리를 했을 때 꼭 맞는 사이즈의 속옷을 선물한 것도 아빠 혼자 생각해내진 못했을 일이었다.

셋이 처음 만난 건 집 앞 카페에서였다. 두 사람이 나란히 있는 모습을 보자 어떤 표정을 지어야할지 몰라 난감했다. 가슴 속에서는 뚜렷한 형체도 없는 복잡한 감정 덩어리가 울렁거렸다.

그날부터 세 사람의 눈치게임이 시작되었다. 아빠는 내가 싫으면 언제든 헤어질 수 있다고 말하면서도 그녀를 좋아하는 마음을 숨기지 못했고, 나는 속으로는 그렇지 않으면서도 두 사람이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는 듯 태연하게 굴었다.


아빠가 가전 렌탈 대리점을 차리느라 전세금을 빼면서 우리는 당분간 그녀의 집에서 지내기로 했다. 당장 살 집이 없기 때문만은 아니라는 걸 나도 알았다. 두 사람이 함께 있고 싶어 하는 마음이 행동과 눈빛에서 그대로 드러났다. 아빠가 행복하기를 바라면서도 달라진 상황이 썩 달갑지는 않았다. 그녀의 집에 내 방을 만드는 게 엄마를 배신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런 이유로 두 사람이 결혼하고 싶어 하는 걸 알면서도 모른 체했다. 아빠가 셋이 함께 하는 미래에 대해 이야기 할 때마다 말을 돌렸다. 몇 번 그랬더니 아빠도 더 이상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렇게 가족도 무엇도 아닌 채로 셋이 함께 지내던 어느 날, 갑자기 아빠가 죽었다.


아빠도 없는 그녀와 나 사이. 

언제 헤어져도 아무 문제가 없을 관계. 


그녀도 속으로는 내가 자기 집에서, 아니 자기 인생에서 하루빨리 나가주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을 테다. 그걸 알지만 아직은 달리 갈 데가 없어서 오늘도 그녀와 나는 눈치게임 중이다.


“오고 있니?”


통화 저편에서 사람들이 웅성대는 소리가 들렸다. 대답을 미루는 사이 그녀가 말을 이었다.


“집에 누가 있어. 놀랄까봐 미리 말해.”


자주 찾아오는 손님이라면 나도 대부분 안다. 아빠와 그녀는 사람들을 자주 초대했다. 나도 집이 북적이는 게 싫지 않았다. 집이 아빠 친구들로 붐빌 땐 그녀도 아빠 친구 중 한 사람이 된 것 같았고 그녀의 친구들로 붐빌 땐 우리 부녀가 초대받은 여러 손님들 중 한 팀이 된 것 같았다. 나는 그녀의 친구들을 이모라고 불렀다. 이모들이 자신들을 그렇게 소개했다.

‘누가’ 있다고 말하는 걸 보니 적어도 내가 아는 손님은 아닌 모양이다.


나는 아파트 건물 밖에 선 채로 902호를 눈으로 짚었다. 방마다 불이 켜져 있고 거실 커튼 너머로 서너 사람의 형체가 어른거렸다. 

나는 발길을 돌렸다.


“친구 만나고 있어요. 좀 늦을 거예요.”

“친구 누구?”“...... 태경이요.”


거짓말이다. 강태경은 아직 학원에 있다. 그게 아니더라도 지금은 밤 9시, 만나자고 불러내기엔 너무 늦은 시간이다. 강태경을 부르기 곤란한 시간에 연락할 다른 사람이 있을 리 없다. 

이번에는 그녀가 뜸을 들였다. 자리를 비켜줘서 고맙다고 말하고 싶은데, 그렇게 말하면 내가 비켜주기를 바랐던 자기 속마음이 드러날까 봐 주저하는 걸지도.


우리 둘 사이에는 정적이 자주 왔다. 한쪽은 어디까지 물어도 될지 적정선을 가늠하느라 뜸을 들였고, 다른 한쪽은 어디까지 대답하는 게 적당한지 가늠하느라 머뭇거렸다. 그 정적을 부수는 역할은 아빠 몫이었다. 아빠는 그녀가 궁금해할만한 걸 내게 대신 묻고 내가 곤란해 할 대답을 나 없는 자리에서 대신 했다. 말하자면 아빠가 그녀와 나 사이의 적정선이었다.

아빠가 없는 지금, 적정선을 가늠하는 건 남겨진 두 사람의 몫. 나는 그 선을 넘을까봐 최대한 적게 마주치고 적게 말하는 방법을 택했다. 그건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너무 늦진 말고.”


걷다보니 가게 건물 앞, 어두컴컴한 계단을 천천히 올라 철문 앞에 도착했다. 어쩐지 평소보다 묵직하게 느껴지는 철문을 밀고 들어서는데, 이상한 일이었다. 30분 전 불을 끄고 문까지 잠근 가게에 다시 불이 켜져 있었다. 

문득 며칠 전 일이 떠올랐다. 퇴근 무렵 나타난 고객이 모자를 교환해달라고 우긴 날이었다. jini_11 데이터는 확실히 문제가 있어보였고 그런 경우는 처음이라 당황스러웠다. 그날 사장님이 구원투수처럼 나타난 시간이 지금보다 조금 일렀던 것 같다. 그날처럼 오늘도 사장님은 밤늦게 다시 가게에 들르셨나보다. 나는 발길을 돌려 계단을 내려왔다.


편의점이 있는 1층에 다다랐을 때였다.

“어?”

“어?”

상대방도 나도 놀랐다. 아는 얼굴이었다.

“퇴근하시나 봐요. 제가 한발 늦었네요.”

손님의 열린 가방 틈으로 베이지색 헌팅캡이 보였다. 또 무슨 불만이 있어서 왔을까. 나는 ‘퇴근’이라는 단어에 은근히 힘을 실어 대답했다.

“네, 퇴근하고 이제 집에 가려고요.”

손님이 내 의도를 눈치 챘는지 삐죽 튀어나온 헌팅캡을 가방 안으로 밀어 넣으며 겸연쩍게 웃었다.

“집이 이쪽 방향이에요? 같이 걸어요.”

집과 반대쪽으로 몸을 틀었는데 하필 손님과 같은 방향이었다. 손님은 동행이 생겨 반갑다는 듯 나와 속도를 맞춰 걷기 시작했다. 이제와 방향을 바꿀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좀 걷다가 적당한 지점에서 샛길로 빠지기로 마음먹었다.


길가에 늘어선 상점들은 하나둘 문을 닫는 중이었다. 이제 막 간판이 꺼진 세탁소를 지날 때 그녀가 입을 열었다. 

“지난번에는 미안했어요. 만나면 꼭 사과하고 싶었어요. 그땐 모자가 불량품인줄 알았거든요.”

뜻밖이었다. 모자를 교환해달라고 찾아왔을 때와는 말투와 태도가 아주 딴판이었다.

나는 보폭을 줄이며 대꾸했다.

“‘그땐’ 그렇게 알았다는 말씀은......”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말이에요. 모자에 문제가 없다는 걸 확인했으니까요.”

“어떻게요?”

손님이 다녀간 후 jini_11 폴더에는 새로운 데이터가 업데이트되지 않았다. 사용자가 모자를 쓰지 않았다는 의미였다. 쓰지도 않은 모자에 문제가 없다는 걸 손님은 어떻게 확인했을까?

“‘모기’가 반복적으로 전송된 이유를 알았거든요.”

손님은 추위 탓인지 오들오들 떨리는 목소리로 그녀의 팀장님 이야기를 시작했다. 팀장님이 얼마나 대단한 능력자인지에서부터 그녀에게 보고를 받을 때마다 한숨을 푹푹 내쉬던 최근의 일까지. 손님의 목소리는 팀장님의 문제가 ‘모기’였다는 걸 알게 된 대목에 이르자 더 이상 떨리지 않았다. 손님은 마치 팀장님과 대화를 나누던 순간으로 다시 돌아간 듯 열을 올렸다.

나는 예의상, 절반은 정말로 궁금해서 물었다.

“그래서 문제의 원인은 찾았나요?”

“훗, 그럼요. 해결책까지 완벽하게 찾았죠.”


긴 대화가 끝나고 손님은 팀장님을 앞세워 문제의 모기아파트로 향했다고 했다. 팀장님이 평소 걷던 길을 뒤따라 걷다보니 모기 발생지로 의심되는 곳을 찾을 수 있었다. 연못이었다. 연못에서 생긴 모기 유충들은 혈관처럼 뻗은 물줄기를 타고 단지 곳곳으로 퍼져나가고 있었다. 단지 안에서만 돌고 도는 물줄기는 고인 물이나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물길은 햇볕이 잘 들어 겨울에도 모기들이 자라기에 충분히 따뜻했다.

손님은 팀장님과 함께 입주민들을 만나 연못으로부터 뻗어나가는 물줄기를 막아야 한다고 설득했다. 며칠 후 물길이 있던 자리는 자갈을 가득 채워 맨발로 걷기 좋은 산책로로 탈바꿈했다. 연못에는 유충을 잡아먹는 송사리를 풀었다.

“오늘도 팀장님네 아파트에 다녀왔어요. 모기가 사라졌으니 ‘모기아파트’라는 오명도 벗어야 하잖아요. 모기들도 탐낼 만큼 자연친화적인 아파트 이미지로 마케팅을 제안했어요. 아파트값 제대로 올려드리려고요.”

손님의 말투에서 자신감이 느껴졌다. 지난번 가게를 찾아왔을 때 왜 그렇게 화를 냈는지도 조금은 이해가 되었다.

“참, 사장님께도 꼭 전해주세요.”

“뭘요?”

“감사하다고요. 마음을 읽는 모자를 만들어주셔서.”

의아했다. 손님의 문제를 해결한 건 모자가 아니었다. 손님과 팀장님이 나눈 ‘대화’였다.

손님이 내 마음을 읽었는지 싱긋 웃으며 말했다.

“모자가 대화를 물꼬를 터준 건 사실이니까요. 마음도 결국 물줄기와 같다고 생각하거든요. 어떤 마음은 오래 한 자리에 고여 있으면 곪아서 주인을 병들게 해요. 그러니까 어디로든 움직여야 하고 그러려면 누군가가 마음을 꺼내줘야겠죠.”

“모자가 팀장님의 마음을 꺼내줬다는 건가요?”

“음, 모자는 마음이 나올 구멍을 작게 만들어줬죠. 마음을 꺼내는 건 모자가 아니라 사람이, 상대방을 이해하고 싶은 누군가가 할 수 있는 역할이라고 생각해요. 물어주고 들어주는 방법으로요. 질문과 대답을 하면서 고여 있던 마음이 밖으로 흐르고 그 과정에서 처음과는 다른 방향으로 변하기도 하죠. 팀장님께는 그 누군가가 저였어요. 이번에는요.”  


지하철역 앞에 다다랐다. 손님이 역으로 들어가는 입구 앞에서 멈춰 섰다.

“전 이제 가볼게요.”

“네? 지하철 타시는 거 아니었어요?”

손님이 싱긋 웃어보였다.

“실은 전 반대방향이에요. 미안하단 말 하고 싶어서 따라온 거예요.”

반대방향인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잠시 후 손님의 뒷모습이 멀어진 방향으로 나도 걷기 시작했다. 손님은 내가 지레짐작한대로 불만이 있어서가 아니라 더 이상 모자가 필요하지 않아서 찾아 온 거였다. 가게 건물 앞에서 모자를 가방 깊숙이 밀어 넣던 손님의 손동작이 떠올라 새삼 미안했다.


어느새 가게 건물까지 왔다. 이제 15분 더 걸으면 아파트다. 꽤 오래 떠돈 것 같은데, 집 앞에서 통화한 시간으로부터 겨우 1시간이 지나있었다. 

음료라도 하나 마실까 하고 1층 편의점 앞에 섰다. 유리문 너머로 안이 들여다보였다. 회색에 가까운 머리카락과 검정색 반코트. 사장님이 벽을 향해 서서 컵라면을 드시고 계셨다. 마스크를 벗은 사장님은 볼이 홀쭉하고 턱과 광대뼈가 도드라져 보였다. 

그리고 두 눈이 빨갰다. 퉁퉁 부어 있었다. 봐선 안 될 장면을 실수로 봐버린 것 같은 기분에 얼른 고개를 돌렸다. 사장님이 이쪽을 볼까봐 서둘러 길을 건넜다.

이전 15화 은경과 기봉 (3)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