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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귤예지 Oct 27. 2024

영이와 현수 (2)

짜증을 내지 않겠다고 수십 번 되뇌었던 현수의 결심은 엄마를 만난 지 세시간만에 무너지고 말았다.

“계속 그렇게 휴대폰만 볼 거야?”

단둘이 온 첫 여행인데다 눈앞에 에메랄드빛 바다가 반짝이는데도 엄마는 심각한 표정으로 휴대폰에만 코를 박고 있었다. 현수 목소리는 귀에 들어오지도 않는다는 듯 대꾸도 없이.

“뭘 그렇게 보냐니까?”

참다못한 현수가 엄마의 팔꿈치를 움켜쥐며 액정 가까이 얼굴을 들이밀었다. 엄마가 화들짝 놀라며 화면이 아래를 향하도록 뒤집었다.

“별 거 아냐. 그냥 뭐가 잘 안돼서.”

“뭐가 안 되는데? 이리 줘 봐.”

“됐어. 나중에.”

나중에 해도 되는 일을 가지고 왜 여기까지 와서 신경 쓰이게 할까. 현수는 턱밑까지 차오른 불만을 애써 삼켰다. 

“어머나. 여기는 바다 색깔이 참 예쁘네. 하늘색도 아니고 초록색도 아닌 것이 오묘해.”

“에메랄드색이라고 해.”

“메, 뭐라고?”

“에, 메, 랄, 드.”

도로에서 꽤 떨어진 모래사장은 도시의 소음으로부터 완전히 단절되어 있었다. 파도가 쓸려가는 소리, 아이들 웃음소리, 이따금 갈매기의 끼루룩 소리만이 들렸다. 현수의 마음도 바닷물에 다듬어진 자갈처럼 동그래지는 기분이었다.

“좋아?”

바다에 완전히 매료되었는지 엄마는 현수의 물음에도 답이 없었다. 바다에 닿은 엄마의 시선은 하얀 거품들이 떼 지어 왔다 밀려가고 또 떼 지어 왔다 밀려갈 동안 그대로 머물러있었다. 10년 전 처음 이 바다에 온 현수의 시선이 그랬던 것처럼.


제주는 오랜 구직활동 끝에 마침내 취업에 성공한 현수가 6개월간의 수습기간을 마친 기념으로 동기들과 함께 왔던 여행지였다. 이미 여러 번 와본 동기들이 난생 처음 제주에 온 현수를 자신 있게 데려온 곳이 여기, 협재해수욕장이었다. 스물아홉의 현수는 바지가 젖는 것도 모르고 해변을 걸었다. 거대한 보석을 녹인 듯 아름다운 바다를 앞에 두고 현수 눈에서는 자꾸 눈물이 흘렀다. 오래 준비한 취업에 성공했고 직접 번 돈으로 여행까지 와서 왜 눈물이 나는지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었다.

눈물의 이유를 깨닫기까지는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정직원이 되고 월급이 늘었지만 현수는 행복하지 않았다. 업무 난이도가 높은 것도, 직장에 괴롭히는 선배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현수는 매순간 최선을 다했고 그만큼 인정받고 있었다. 예전에는 비싸서 엄두도 못 내던 패밀리레스토랑에서 친구들을 만날 수 있었고 원하면 차를 살 수도 있었다. 그런데도 전혀 행복하지 않았다. 취업이 되고부터, 취업이 되어버린 그때부터 현수는 중요한 뭔가를 영영 잃은 기분이었다.


“너 현주 기억나지? 4학년 때 너희 반이었던.”

엄마가 바다를 향해있던 몸을 현수 쪽으로 돌리며 물었다.

“기억나지. 나랑 이름 비슷해서 다들 헷갈려했잖아. 졸업식날도 걔가 내 졸업장을 받아가는 바람에 밤늦게 우리 집에 왔지 아마?”

“이름만 닮은 게 아니라 공부도 비슷하게 잘했지. 네가 1등하면 걔가 2등하고, 걔가 1등하면 네가 2등하고.”

“걔가 거의 1등이었어. 난 딱 한번 1등이었고.”

현수는 갑자기 훅 불어오는 바람을 피하려고 엄마와 반대 방향으로 몸을 약간 틀며 말했다.

“응? 뭐라고?”

“걔가 나보다 공부를 더 잘했다고.”

“얘는? 네가 걔만큼 학원엘 다녔으면 훨씬 잘했어. 게다가 지금은 네가 직장도 더 좋고.”

“걔 선생님이라고 하지 않았나?”

“그래. 교대 졸업하고 선생님 됐지.”

“나더러 선생님만한 직업 없다고 노래 부르던 사람이 엄마 아니었어?”

“그랬지. 방학 있고, 연금 나오고 하니까. 근데 방학이라고 마냥 노는 것도 아니고 연금도 많이 줄었다더라. 학교보다야 너희 회사가 낫지. 월급 많고 정년 보장되고 학부모들 상대 안 해도 되고. 월급에서 얼마씩 떼서 저금하면 그게 곧 연금이지 뭐. 결혼정보회사에서도 공기업을 1등으로 쳐준다더라.”

또 무슨 얘기를 꺼내시려고 결혼정보회사까지 들먹이실까. 월급이 많은 대신 일도 많고, 정년이 길다는 건 그만큼 회사에 오래 묶여있어야 하는 뜻이라고, 조목조목 반박하고 싶은 걸 현수는 꾹 참았다. 처음이니까, 첫 여행이니까.

“그래서, 현주가 왜?”

엄마가 딸에게 고정되다시피 했던 시선을 슬쩍 바다 쪽으로 돌리며 말했다.

“아니...... 현주가, 저기 뭐냐, 그, 시집을 간다더라.”

“시집? 난 또 뭐라고.”

“같은 학교 다니는 남자래. 현주보다 후배라더라. 나이는 동갑이고.”

“그렇구나.”

“뭐라고?”

“별말 안했어. 이제 가자.”

더 있어봤자 엄마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뻔히 알 것 같아 현수가 먼저 몸을 일으켰다. 엄마는 엉덩이에 묻은 흙을 털어내고도 구부정한 자세로 한참을 더 서 있다가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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