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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귤예지 Oct 27. 2024

영이와 현수 (3)

같은 작업에도 새 기계보다 많은 시간이 걸리는 구식 기계처럼 영이는 무슨 일에든 젊은 사람들보다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무릎을 펴고 일어나 걸음을 옮기는 간단한 일에서부터 어플을 다운받고 실행하는 복잡한 일까지, 어느 것 하나 쉽지가 않았다.

모자 가게 점원은 어플을 손수 설치해주며 모자를 쓰자마자 바로 메시지가 뜰 거라고 알려줬는데, 어쩐 일인지 딸이 모자를 썼는데도 휴대폰에는 아무것도 뜨지 않았다. 평소라면 딸에게 물어 간단히 해결했겠지만 이번만큼은 그럴 수가 없었다. 딸이 영이의 휴대폰을 조작하고 있을 때 화면 위에 딸의 생각이 떠오를지도 모를 일이었다. 떠오른 메시지의 비밀을 눈치 챈 딸이 캐묻기 시작하면 영이 귀가 고장나버린 사실이 드러나는 건 시간 문제였다. 

렌터카로 돌아와 휴대폰을 켜니 점원에게서 답장이 와있었다. 만약의 상황에 대비해 점원의 연락처를 알아둔 게 다행이었다. 처음에 모자 두 개를 달라는 영이의 말에 난처해하던 점원은, 중년 여자가 어디선가 진열대에 놓인 것과 똑같은 모자 하나를 더 꺼내 영이에게 내밀자 기다렸다는 듯이 나서서 영이를 도왔다. 점원이 보낸 답장에는 사라진 알림창을 되살리는 방법이 적혀있었다.

조수석에 앉은 영이는 딸이 운전에 집중한 틈을 타 점원이 보내준 방법들을 차근차근 실행했다. 막상 해보니 어렵진 않았다. 잠시 후 화면 위에 네모난 창이 떠올랐다.


- 배 안 고프냐고?


“배 안 고프냐고?”

메시지가 화면에 뜨는 동시에 귀로도 들렸다. 영이 귀에까지 들렸다는 건 딸이 고함에 가까운 큰 소리를 내질렀다는 뜻이다. 

“그러게. 벌써 밥시간이 됐네. 뭘 먹으면 좋으까?”

당황한 티를 숨기며 대꾸하고서 영이는 얼른 화면을 봤다. 


- 된장찌개, 산채비빔밥, 두부전골, 고등어구이.


딸은 지금 영이가 평소 즐겨먹는 메뉴들을 떠올리고 있었다.

“오기 전에 좀 찾아봤는데 근처에 고등어구이 잘하는 집이 있더라고.”

고등어구이. 듣기만 해도 군침이 돌았다. 하지만 영이는 질문을 바꿔 다시 물었다.

“너는 뭐 먹고 싶은 거 없어?”

딸의 대답은 도로의 소음과 함께 공중으로 흩어져버렸다. 하지만 흩어진 대답은 휴대폰 화면에 남아있었다. 딱 한 가지 메뉴였다.


“딸, 우리 흑돼지구이 먹자.”

“흑돼지? 엄마 속 더부룩하다고 고기 질색하잖아.”

“그래도 제주도에서는 흑돼지를 먹어야 한대.”


순간 신호가 빨간색으로 바뀌었다. 딸이 무어라 말을 하며 영이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순간 당황한 영이는 휴대폰 화면이 아래를 향하도록 뒤집었다. 화면에 떠오른 메시지는 당연히 읽지 못했다.

“뭐?”

“누가 그랬냐고. 제주도에선 흑돼지를 먹어야 한다고.”

딸의 입모양을 보고 무슨 말인지 알아채는 데는 성공했지만 이번에는 대답할 말이 마땅하지 않았다.

“그 뭐냐...... 유, 유튜브에서.”

“유튜브를 봐?”

“보지. 왜 안 봐. 아무튼 거기서 말하길, 우리 나이쯤 되면 고기도 먹어줘야 한다더라.”

얼씨구, 영이는 자신의 순발력에 놀랐다. 유튜브에는 없는 게 없다는 말을 어디선가 주워듣고 대충 둘러댄 건데 다행히도 딸은 그 말을 믿는 듯했다.

“참, 엄마도 웃겨.”

“웃기면 웃어.”


신호가 모녀의 대화를 위해 더 이상 기다려주기는 곤란하다는 듯 다시 초록색으로 바뀌었다. 현수가 잽싸게 내비게이션의 목적지를 바꿨다. 이미 알고 있던 곳인 듯 주저 없이 상호를 넣는 걸 보며 영이는 모자를 준비한 스스로가 대견하게 느껴졌다.

줄을 서서 20분을 기다린 끝에 모녀는 제일 구석진 테이블에 앉았다. 현수는 고기가 다 익기도 전에 맥주부터 따랐다.

“술 마시려고?”

현수가 당연한 걸 묻느냐는 듯 싱겁게 웃었다.

“그럼, 마셔야지.”

“운전은 어쩌고?”

“대리 부르면 되지. 그래서 일부러 숙소 가까운 데로 왔지.”

“돈 아깝게.”

“두고두고 아쉬운 것보다 나아.”

“술을 못 마시는 게 두고두고 아쉬워? 누가 들으면 술꾼인 줄 알겠네.”

영이는 누가 듣는 게 정말로 두렵기라도 한 듯 주변을 살피다 다시 현수의 입을 봤다.

“많이는 안 마셔. 먹어봤자 하루 한 캔 정도?”

“하루 한 캔씩을 매일? 아이고. 아직 시집도 안 간 애가.”

“시집은 무슨 시집. 술맛 떨어지게 또 그런다.”

“술맛 좀 떨어지면 어때. 현주 걔는 임신 준비한다고 일부러 살까지 찌운다는데.”

“엄마!”

현수가 앙칼지게 쏘아붙이며 거의 빈 맥주잔을 테이블 위에 탁 내려놓았다.

“네가 현주보다 뭐가 빠지니. 키 크지. 얼굴 예쁘지.”

풋, 현수의 비웃는 소리가 영이 귀에 생생하게 들리는 듯 했다.

“요즘은 만나는 사람도 없어? 예전에는 남자친구 얘기도 곧잘 하더니.”

“없어. 그리고 말했지. 있어도 엄마한테는 말 안 할 거라고.”

“그건 또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왜?”

“엄마가 맘에 안 들어 하니까. 내가 만나는 사람들.”

“마음에 안 들어 해? 내가?”

“응. 엄마가.”

영이는 기억을 곰곰 되살려보았다. 현수가 아직 20대였을 때 남자친구라며 소개해준 두어 명이 떠올랐다.

“걔들은 너랑 안 어울렸으니까.”

현수가 이번에도 풋, 웃으며 무슨 말을 하려다 말고 맥주잔에 술을 따랐다. 나오려는 말을 도로 목구멍으로 집어넣으려는 듯 맥주를 벌컥벌컥 마셨다. 영이에게는 낯선 모습이었다.

영이는 외투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휴대폰을 슬쩍 꺼내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엄마 화장실 좀 다녀올게.”

딸이 방금 하려다 만 말이 무엇인지 궁금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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