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게로 들어서자마자 영이는 허리를 펴고 서서 숨을 몰아쉬었다. 계단을 오르는 동안 힘이 부쳐 세 번이나 멈춰 선 그녀였다.
가게에는 두 사람이 있었다. 한 사람은 50대로 보였고 외투를 입는 중이었다. 다른 한 사람은 앳된 얼굴의 젊은 점원이었다. 젊은 점원이 영이를 보자마자 입구에서 가까운 의자를 끌어다주었다.
“괜찮으세요?”
“아이고. 고맙습니다.”
육십을 기점으로 낯선 사람에게 고맙다고 말하는 일이 부쩍 늘었다. 버스에서 자리를 양보하는 학생들, 길을 물을 때마다 귀찮은 내색 없이 대신 검색해주는 젊은이들, 거대한 주문기계 앞에서 헤매는 영이에게 선뜻 다가와 도와주는 청년들까지. 모두 영이에게는 고마운 사람들이었다.
영이는 의자에 앉는 대신 진열대로 다가갔다. 의자를 권했던 점원이 한 걸음 거리를 두고 뒤따랐다.
“딸이랑 여행을 가기로 했어요.”
영이는 말을 건네는 동시에 점원의 입을 봤다.
“네.” 점원이 답했다.
“햇빛 가릴 모자가 하나 필요해서요. 좀 예쁘기도 하면 좋겠고.”
‘예쁘기도 하면 좋겠다’는 말을 할 때 영이의 목소리는 수줍은 소녀처럼 조금 떨렸다. 그러면서도 점원의 입에서 눈을 떼지는 않았다. 시간이 적당히 흐르고도 점원이 별말을 않는 걸 확인하고서야 진열대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영이의 시선을 사로잡은 건 자줏빛 누빔모자였다. 앞으로 동그란 창이 있고 오른쪽 이마 부근에는 꽃모양 자수가 새겨져있었다.
“이 모자, 한번 써 봐도 되나요?”
점원이 뭐라고 대답하는 것 같았는데 영이가 알아듣기에는 너무 길고 장황했다. 영이의 눈치를 살피던 점원이 고민이 깃든 얼굴로 나갈 채비를 마친 중년 여자를 붙잡았다. 젊은 점원이 질문하고 중년 여자가 대답하는 모양새였다. 영이 쪽에서는 두 사람의 입모양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영이는 두 사람이 어떤 관계일까 짐작해보았다. 겉모습에서 추측되는 나이 차이로는 모녀사이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아주 닮지는 않았지만 그건 영이와 현수도 마찬가지였다. 이 집 딸도 아빠를 쏙 빼닮았나 보네.
점원이 몸을 틀어 영이 쪽으로 다가왔다. 점원의 입모양을 봐야한다는 걸 알면서도 영이는 자줏빛 누빔모자로 자꾸만 시선이 갔다.
“한번만 써보면 안되나요? 집에서 머리도 감고 나왔는데.”
점원이 마지못해하는 표정으로 모자를 들어 영이에게 건넸다. 영이는 점원의 마음이 바뀌기 전에 얼른 모자를 받아들고 거울 앞에 섰다. 주름이 자글자글 한 얼굴이지만 피부는 여전히 희었다. 30년을 시장 가판대에서 일한 것치고 이 정도면 괜찮은 편이라고 위안하며 영이는 모자를 썼다. 희끗한 머리카락은 물론이고 이마에 드리운 그림자 덕에 주름도 적당히 가려졌다. 무엇보다 밝은 자줏빛은 피부에 생기를 더했다. 얼굴이 푸석하다는 둥 주름이 늘었다는 둥 뻔히 예상되는 딸의 잔소리를 조금은 덜 수 있겠다는 생각에 마음이 놓였다.
부쩍 나빠진 귀만 해결하면 여행 준비는 끝이다. 2년쯤 됐을까. 사람들 말소리가 점점 멀어지더니 요 몇 달은 고장난 형광등처럼 들리다 말다 했다. 다행히 아직 눈은 멀쩡해서 상대방의 입 모양과 표정을 보고 대충의 의미를 알 수 있었지만 버스의 앞자리나 공원 벤치에 나란히 앉은 사람의 말은 전혀 못 듣고 놓칠 때가 많았다. 딸에게서 모처럼 긴 휴가가 생겼으니 단둘이 제주도에 가자는 말을 듣고 마냥 좋아하지 못한 것도 귀 때문이었다. 2박 3일을 내내 딸의 입만 쳐다보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사실 영이가 오늘 집을 나선 건 은행에 들러 통장잔고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영이의 수입은 연금과 오십부터 조금씩 모은 적금의 월 이자, 괜찮다는데도 딸이 한사코 보내주는 용돈이었다. 남들 보기에 넉넉하지 않을 수 있어도 영이에게는 한 달 생활비로 부족하지 않았다. 생활을 이어가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선택한 절약이 몸에 익은 덕분이다. 돈을 벌지 않아도 매달 조금씩이나마 잔고가 늘었다.
그간 모은 돈으로 보청기를 구입할 작정이었다. 귓속에 쏙 들어가는 작은 크기로 사야 딸이 눈치 채지 못할 것이다. 보청기는 작을수록 가격이 비싸다는 언제가 들은 이야기를 떠올리며 영이는 집을 나섰다.
은행으로 향하는 길에 모자 가게 입간판을 보고 불쑥 발길을 튼 건 평소의 그녀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 점원이 영이와 눈을 맞추고 차근차근 해주는 이야기를 들으며 영이는 눈 뜬 심봉사가 된 기분이었다.
점원의 말에 따르면 영이가 방금 벗은 자줏빛 누빔모자에는 사람의 마음을 글자로 바꿔 휴대폰으로 보내주는 특별한 능력이 있었다. 점원은 그 증거로 영이가 모자를 쓴 몇 분 사이에 떠올린 생각을 알아맞히기도 했다. 그러니까 모자는 받아쓰기 어플이나 다름없었다. 영이가 종종 통화내용을 놓치는 걸 알고 관리사무소 직원이 설치해준 받아쓰기 어플은 통화 상대방의 목소리를 화면에 실시간으로 받아써주어 대화를 매끄럽게 이어갈 수 있도록 도왔다.
이 모자가 현수의 마음을 글자로 바꿔 휴대폰으로 보내준다면, 현수의 말을 놓쳐도 곤란해질 일은 없을 것이다. 말이라는 게 결국 마음이 밖으로 나오는 거니까.
“이 모자, 같은 걸로 두 개 살 수 있을까요?”
“두 개요?”
“딸애랑 같이 쓰려고요.”
점원이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 내가 귀가 잘 안 들려요. 우리 딸은 내 귀가 이런 걸 아직 모르고요.”
“손님, 그런 이유라면 모자보다 보청기가 더 도움이 될 거예요. 주변에 보청기 가게가 있는지 알아봐드릴까요?”
영이의 의도를 눈치 챈 게 미안한지 점원이 조심스레 제안했다.
“우리 애 성격이 좀 그래요. 내 귀가 이런 거 알면 가만히 안 있을 거예요. 진작 병원에 안 갔다고 얼마나 난리칠지 눈에 훤해요.”
“그럼 얼른 병원에 가보시는 편이......”
이번에도 점원은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다가는 난처한 듯 말끝을 흐렸다.
“갈 거예요. 가야지요. 근데 당장 여행이 다음 주니까, 이번 여행에서만 좀 쓸게요.”
“그렇지만 손님, 이 모자는......”
순간 점원의 입모양을 놓치고 말았다. 표정으로 보아 어렵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았다. 영이는 애가 탔다.
“돈은 충분히 있어요. 부탁해요. 딸애랑 둘이서 가는 첫 여행이에요. 얘가 어디에 가고 싶어 하는지, 뭘 먹고 싶어 하는지 알고 싶어서 그래요. 만날 나한테 맞춰주기만 하는 애거든요. 말을 알아들을 수 있을 때도 난 그 애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통 몰랐어요. 원체 자기 속 얘기를 안 하거든요. 이번에는 내가 좀 맞춰주고 싶어요.”
젊은 점원의 입모양을 주시하고 있던 영이 앞을 누군가 막아섰다. 나갈 채비를 한참 전에 마치고도 선뜻 나가지 못하고 출입구 쪽을 서성이던 중년 여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