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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귤예지 Jun 27. 2021

둘째, 가져도 될까?

얼마 전부터 체중계에 올라갈 때마다 몸무게가 조금씩 줄어있었다. 몇 달간 소수점 뒷자리만 오르락내리락하더니 며칠 사이 앞자리까지 바뀐 거다. 하루 세끼에 간식까지 꼬박꼬박 챙겨 먹으며 운동이라고는 육아가 전부인 생활패턴에 체중감소라니. 말로만 듣던 모유수유의 다이어트 효과로구나 싶었다.

그러고 보니 부쩍 배가 자주 고프기도 했다. 저녁식사 후 아이스크림까지 하나 챙겨 먹고도 잠자리에 들면 다시 음식 생각이 났다. 누워있으면 배안에서 콕콕 쑤시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생리통이라고 하기에는 아직 가벼운 통증. 이거 혹시, 안에서 누군가 똑똑 노크하는 건가.


가슴이 철렁했다. 아직 모유수유 중이니 괜찮을 거야, 하는데 모유수유 중에 둘째를 가졌다던 조리원 동기의 말이 떠오른다. 아직 생리도 시작하지 않았으니 아닐 거야, 하는데 생리 전에도 배란은 일어날 수 있다는 글을 본 기억이 난다.

하던 일을 내려놓고 얼른 서랍을 뒤졌다. 작년에 쓰다 남은 테스트기를 찾아 곧장 화장실로 향했다.


우리 부부는 서른 넘은 나이에 결혼을 했다. 주변에는 아이 부모들이 꽤 있었다. 산후우울증을 겪고 늘어진 뱃살이 돌아오지 않는다며 투덜대던 친구들. 아이가 기다리고 있어 회식 참석은 엄두도 내지 못하던 동료들. 아이가 아파 잠을 설쳤다며 시커먼 다크서클을 달고 출근하던 선배들. 우리가 임신을 한다면 겪게 될 시나리오들이 뻔히 보였다.

동물 한 마리도 키워본 적 없던 내게 육아란 마치 철저히 단련된 등산가들에게나 허락된 높은 산처럼 보였다. 어려서 아무것도 모를 때 후루룩 애를 가져야 한다던 어른들의 말씀은 괜한 말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예상되는 어려움을 각오하고 우리는 아이를 가지기로 했다. 이유는 단 하나. 우리를 닮은 아이를 낳고 싶다는 것. 아이가 줄 행복이 모든 어려움을 상쇄하고도 남을 만큼 커 보였다.


잔뜩 겁을 먹고 시작한 육아는, 역시나 높은 산이었다. 예상했던 것보다 더 높은 산, 너머 또 산, 너머 또 산의 연속이다. 출산과 그 후의 회복과정, 양육자에게 주어지는 끊임없는 과제에 대해 누구도 100퍼센트 전부를 말해주지는 않았던 것.

"이 산은 말이야. 전체적으로 만만한 산이 아니지만 특히 500미터 지점까지가 고비야. 울퉁불퉁한 바윗길인 데다 경사도 아주 심하거든." 하는 말을 듣고 고비가 오기 전에 적당히 쉬어가면 되겠지 했는데 나는 이미 출발도 전에 숨이 찬 꼴이다.

100미터도 못 가 뒤를 돌아본다. 얼마큼 왔지? 그리고 다시 앞을 향해 보이지도 않는 정상 쪽으로 고개를 들어본다. 얼마큼 남았지? 이 산은 일단 한번 오르기 시작하면 다시 내려갈 수 없는 산. 나와 남편은 서로 번갈아 밀어주고 당겨주며 낑낑대고 있다.

고비라고 하던 500미터 지점이 지났는지 아직인지도 모르겠다. 고비라고 생각했던 지점을 겨우 통과했는데 또 다른 고비가 눈앞에 있고 그 지점을 지나자 다른 고비가 나타나고. 이런 일이 반복되자 이제는 내가 고비라고 생각했던 지점이 이 코스에서 제일 험난하다던 그 고비가 맞는지조차 불확실해지기 시작한다.


임신과 출산, 신생아 시기까지 무사히 넘긴 지금. 출산으로 약해진 몸이 점점 회복되고 아이가 커가는 모습을 보는 재미에 마음도 겨우 가뿐해지기 시작했는데, 또다시 임신이면? 다시 처음부터 산을 올라야 한다는 말이다. 욕실 거울 속에 비친 여자가 고개를 세차게 가로저었다.

테스트기에는 빨간 줄 하나가 또렷하게 그려졌다. 휴. 한숨이 새어 나왔다. 안도의 한숨. 동시에 웃음이 픽 터져 나왔다. 작년에 테스트기를 붙들고 내쉬었던 숱한 한숨들이 떠올라서. 그때는 아쉬움이 잔뜩 묻은 한숨이었다.


"테스트기 결과를 기다리는데 가슴이 얼마나 콩닥콩닥하던지..."

귀가한 남편을 붙들고 해프닝을 털어놓았다. 잠자코 듣고 있던 남편이 약간 애가 탄 목소리로 재촉한다.

"그래서 결과는? 어떻게 됐는데?"

"어떻게 되다니. 당연히 아니었지. 그러니까 이렇게 웃으며 얘기하는 거잖아."

남편의 얼굴에 순간 한마디로 설명하기 어려운 복합적인 감정이 비쳤다. 남편은 아마 묻고 싶을 거다. 임신이 아니라서 안도하는 것이 곧 둘째 계획이 영영 없다는 걸 의미하는지.

남편은 아이에게 형제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는 자신에게 누나가 있어서, 그리고 내게 여동생이 있어서 우리가 누리는 선물, 세상에 언제나 내 편이 되어줄 사람이 적어도 한 사람은 있다는 든든함을 아이에게도 주고 싶어 했다. 다만 출산을 하는 사람도 지금 아이의 양육을 주로 담당하는 사람도 나이기에 적극적으로 말하지 못할 뿐.


실은 임신테스트기 결과를 기다리는 그 짧은 시간 동안 내게도 오만가지 생각이 떠올랐었다. 임신일 경우에 일어날 일들. 당장 모유수유를 중단해야 하고, 좋아하는 회를 참아야 하고, 체중이 완전히 돌아오지도 않은 상태에서 또다시 식단을 신경 써야 하고, 복직시기는 최소 1년 이상 미뤄져야 하겠지.

하지만 부정적인 생각만 떠올랐던 건 아니다. 남편의 말처럼 둘째는 우리 아이에게 분명 좋은 선물이 될 것이다. 내 여동생이 내게 그렇듯. 동생은 엄마에게 차마 꺼낼 수 없는 이야기도 털어놓을 수 있는, 부모님 걱정을 함께 나눠질 수 있는, 먼 길을 떠날 때 주머니를 털어 용돈을 쥐여주면서도 아까운 마음이 들지 않는 진짜 내 편이다.

먼 훗날 나와 남편이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때도 아이가 온전히 믿고 의지할 수 있는 가족이 한 명쯤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나도 다.


아직은 모르겠다. 남편에게는, 직접 낳지도 못하면서 둘째를 내심 바라고 있다는 사실에 심통이 나서, 우리 앞에 둘째는 없다고 말해버렸지만 솔직히 모르겠다.

아이를 가진다는 결심은 직장에서 새로운 프로젝트를 시작할지 말지를 고민하는 것과는 확실히 다른 차원이다. 득과 실을 따져서 나온 결괏값에 따라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임신과 육아가 결코 만만하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우리가 마음이 원하는 방향을 따라 아이를 만난 것처럼 말이다.


일단은 이미 작아져버린 아이의 옷을 버리지 못하고 차곡차곡 모아두었다. 육아의 고비들을 조금 더 넘어 보아야 결정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옷의 주인이 우리 아이의 친동생이 될지 이웃집 동생이 될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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