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 점심시간 사용설명서
잔여 연차휴가를 서둘러 쓰라는 메일이 왔다. 벌써 올해도 절반이 지났다. 연말까지 달성해야 하는 지표들 중에는 '연차휴가 사용실적'도 있다. 근로자들은 당연한 권리를 쓰고 관리자들은 이를 독려하라는 취지다.
계산해 보니 올해 부여받은 연차휴가 중 90% 이상이 남아있다. 아이들 아플 때를 대비해 아낀 탓이다. 작년에도 아끼고 아끼다 결국 연말에는 휴가를 결재받고도 회사에 나올 수밖에 없었던 기억이 났다. 올해도 그런 불상사가 생기면 안 되지. 내친김에 휴가 결재를 올렸다.
징크스가 있는데 꼭 내가 휴가를 내는 날에는 병원 갈 일이 생긴다는 거다.
얘들아, 부디 이번만은 아프지 말아 다오.
휴가일 아침, 아이들을 등원시키고 집으로 돌아와 제일 먼저 한 일은 청소.
나도 깨끗한 집에 살고 싶은 사람이다. 그런데 왜 이렇게 더러운 집에서 살고 있느냐고 묻는다면, 집 상태는 내 의지만으로 해결되는 부분이 아니다. 평일에는 그날 먹은 그릇을 치우고 그날 입은 옷을 빨고 하루치 더러워진 몸과 이를 닦아주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당장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집안일만 쳐내며 살다 보니 식탁이나 거실바닥처럼 닦지 않아도 큰 문제가 생기지 않는 구역들은 방치되고 만다. 옷장이나 서랍 속, 베란다, 냉장고 안은 말할 것도 없다.
모처럼 휴가니 청소기, 식세기, 세탁기 돌리는 것 말고 제대로 된 청소를 하고 싶다. 집안 환경을 영구적으로 개선할 수 있는 활동이 뭐가 없을까? 하나 있다. 쓰지 않는 물건을 처분하는 것. 그러면 물건이 차지하고 있던 공간만큼을 영구적으로 확보할 수 있다. 아이들 더 어릴 때 갖고 놀던 뽀로로 인형과 쓰지 않는 쿠션커버 몇 장을 버렸다. 더 이상 입지 않는 옷 몇 벌도 함께 버렸다.
낮 수영장은 처음이다. 늘 보던 사람들 대신 낯선 얼굴들. 어르신 세 분이 킥판을 잡고 줄 지어 가다 멈추더니 선 채로 키득거리신다. 레인 중간에 떡하니 서서 진로를 방해하시는데도 누구 하나 나무라거나 제지하는 사람이 없다. 이 시간에는 이게 디폴트 값인가. 로마에서는 로마법을 따라야지, 싶어 나도 가만히 있었다. 그러면서 어르신들을 몰래몰래 구경하는데, 좀 재밌다.
"니는 여태 젊어서 체력이 좋아." 라며 70대(로 추정되는) 어르신을 부러워하는 80대(로 추정되는) 어르신.
"이따 입구에 상치 한 봉지 챙겨 가." 저도 한 봉지 챙겨가면 안 될까요? 묻고 싶었다.
무릎이 불편해서 수술을 해야 하는데 "남편 밥 차려줄 사람이 없어서 못한다"는 어르신 말씀에는 끼어들고 싶은 걸 간신히 참았다. 아니, 요즘 세상에 자기 밥도 못 차려먹는 남편이 아직도 있나요? 나 참, 어이가 없어서.
아침부터 청소를 하고 바삐 수영장에 다녀온 이유가 다 있다.
청소를 마친 깨끗한 집에서, 운동 후 가뿐해진 몸으로, 내가 좋아하는 '짜파게티'를 먹으며, 영화 한 편.
이번 휴가를 결정한 후 줄곧 상상했던 순간이었다.
입사 첫해, 연고 없는 지방에서 혼자 자취하던 그 해 생일, 부서 선배들이 축하의 의미로 밥을 사주겠다는데도 나는 약속이 있다며 혼자 집에 왔다. 선배들이 불편하거나 싫은 게 아니었다. 생일이니 좋아하는 걸 먹으며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그날 저녁메뉴가 짜파게티였다.
짜파게티는 물을 넉넉하게 넣고 끓여서 따라낸 후에도 잘박하게 남기는 게 포인트다. 거기다 짜장가루를 넣고 비비는데, 너무 골고루 비비면 또 별로다. 듬성듬성 덜 비벼진 부분도 있고, 또 한쪽은 가루가 뭉쳐진 부분도 있어야 더 맛있다.
엄마께 얻은 김치도 오랜만에 꺼냈다.
캬, 나트륨엔 역시 나트륨이지.
징크스가 괜히 징크스가 아니다. 둘째가 낮잠시간에 기침을 많이 했단다. 요 며칠 목소리도 쉬어 있다. 불안하다. 목이 부어 열이 오르기 전에 병원에 데리고 가야겠다.
평소라면 병원에 데려갔다가 다시 어린이집으로 돌려보내고 나도 회사로 돌아갔겠지만, 오늘은 엄마가 휴가니 아이들도 일찍 하원. 병원에서 둘째 진료를 받고, 집에 들러 돗자리와 간식을 챙겨, 놀이터로 향했다. 내친김에 둘째 친구들도 불러 아주 신나게 놀았다. 아이들은 내가 챙겨 온 간식을 배불리 먹고, 모기들은 우리 피를 배불리 먹었다.
한해의 절반이 지났는데 아직 휴가는 10개나 더 남았다.
한 달에 한번 이상 이런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뜻이다.
얘들아, 아프지 말자. 진짜 아프지 말아 줘. 엄마 휴가를 온전히 휴가로 쓸 수 있게. 부탁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