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 점심시간 사용설명서
6월은 점심 약속이 많은 달이다. 6월과 12월은 어쩔 수 없다. 떠나는 사람들과 작별인사는 해야 하니까.
우리 회사는 순환보직제를 운영한다. 한 부서에서 근무하는 기간이 짧게는 2년, 길게는 3년이다. 이렇다 보니 매 반기마다 전보 발령문에 뜨는 대상자의 수도 적지 않다.
우리 부서의 이번 전보대상자는 모두 여섯 명. 그중 한 사람은 내 옆자리 H다.
- 다음 주에 점심 같이 먹어요! 언제가 좋으세요?
전보 다음날, H가 메신저로 말을 걸었다. 사무실 짝꿍이지만 같이 밥을 먹은 적은 손에 꼽힌다. 초반에는 매 점심마다 약속이 있냐고 물어오던 그녀도 혼자 먹겠다는 대답을 몇 번 듣고 나서는 더 묻지 않았다. 같이 먹을 사람이 있는데도 굳이 혼자 점심을 먹는 내가 잘 이해되지 않는지, 그녀는 미안해하는 기색을 보인 적도 몇 번 있다.
사람들이 싫어서도 아니고, 같이 먹을 사람이 없어서도 아니며, 단지 혼자 있을 시간이 필요해서라는 걸 그녀도 머지않아 알게 될 거라고 믿는다. 그녀는 8월 출산을 앞둔 임산부다.
- 나는 다 괜찮아요. 대리님 편한 날로 정해요.
H가 출산 후 다시 회사로 돌아온 후에도 우리가 여전히 같은 부서일지는 알 수 없다.
일로 만났지만 매일 옆자리에 앉아 아침부터 저녁까지를 함께 하다 보니 정이 든 우리. 그녀와 정든 사람이 어디 나뿐일까. H의 달력은 며칠남지 않은 마지막 출근날까지 점심약속으로 빼곡하지 싶다.
점심은 H와 나, 옆부서 팀장님까지 셋이 함께 했다. 메뉴는 그녀의 뱃속에서 무럭무럭 자라고 있는 태아가 골랐다. 옛날순두부.
몽글몽글한 순두부를 떠먹다 보니 어쩐지 마음도 몽글몽글해진다.
그동안 고생 많았다는 말, 덕분에 회사 생활이 조금 더 즐거웠다는 말, 앞으로 하는 일마다 잘 되길 바란다는 말이 입안에서 맴돈다. 근데 입밖으로는 쉽게 나오지가 않는다. 너무 작별인사 같아서다.
며칠 후면 헤어질 사이라는 걸 서로가 알지만 다시 또 볼 것처럼, 다음 달에도 계속 옆에 있을 사람들처럼 일상적인 대화 위주로 주고받았다. 그녀는 이르면 내년 초에 복직할 계획이라고 한다.
"저 그때 다시 이 부서로 올 수 있을까요?"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그때는 내가 없겠지. 다음은 내가 옮길 차례다.
"참, 대리님 빠지는 자리에는 누가 오나요?"
옆부서 팀장님이 물었다. H가 잘 모르겠다고 답하며 내 쪽을 힐끗 봤다. 혹시 뭐 들은 거 있으세요? 하듯.
"저도 궁금하네요. 누구랑 일하게 될지."
부서로 발령받은 사람은 모두 여섯. 내 옆자리에 앉는 사람이 그중 하나일지, 아니면 기존에 있던 사람들 중 누군가일지는 부서장님이 결정할 부분이다. 중요한 건 누가 오든 나란히 앉는 한 업무적으로든 업무 외적으로든 가장 많은 교류를 하게 되고, 서로에게 적잖은 영향을 주는 관계가 될 거라는 점이다. 좋은 동료와 함께 일하면 첫 번째로 마음이 편하고, 두 번째로 손과 발이 편하다. 하지만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는 말이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말은 아니다.
그래선지 이번 전보를 앞두고 부서 간 인재영입전이 스포츠구단의 그것 못지않게 치열했다. 인품까지 갖춘 능력자로 알려진 어느 팀장님은 무려 15개 부서로부터 러브콜을 받았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 팀장님을 영입한 최후의 승자가 누구였을까? 놀랍게도 바로 우리 부서다. 새로 오신 부서장님도 회사에서 일을 잘하기로 소문난 분. 기대가 크지만, 조금은 떨리고 조금은 두렵다. 서로가 서로에게 적응하는 시간, 우리가 서로 잘 맞는 퍼즐조각들인지를 알기까지 당분간은 이 어색함을 견뎌야 하지 싶다.
두려움과 떨림.
벨기에 출신 작가인 아멜리 노통브의 소설 제목이기도 하다. 벨기에 여성이 일본 회사에 취업해 회사 안에서의 인간관계 때문에 고통받는 내용이다. 이 책을 소개해 준 사람은 한때 함께 근무했던 직장동료 C였다. 10년 전쯤 작은 지방도시에서 만나 2년간 함께 일했는데, 우연히 취미가 같다는 걸 알고 서로의 글을 바꿔 읽는 취미메이트가 되었다. 서로 다른 부서로 배치받은 후에도 틈틈이 연락을 주고받았고, 지금은 취향이 비슷한 사람들을 모아 6개월에 한편씩 단편소설을 써서 공유하는 모임을 이어오고 있다. 아, 물론 온라인에서만 활동하는 모임이다. 멤버들이 전국 각지에 흩어져있기 때문이다.
현재 C의 근무지는 대구다. C는 전보철이면 발령문에 자기 이름이 뜰까 봐 두려워한다. 초등학생 아들을 키우는 그에게는 삶의 근거지를 옮기는 게 큰 부담일 터.
그런데도 나는 전보 발령문이 뜨면 은근히 기대하는 마음으로 C를 비롯해 함께 일했던 사람들의 이름을 검색해 본다. 좋았던 사람들을 다시 만날 수 있을까 하는 기대에서다. 다음 전보에서부터는 검색할 이름이 하나 더 늘었다. H. 자꾸 돌다 보면 언젠가는 다시 만나겠지. 지구는 둥그니까. 회사도 둥그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