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16년 차의 점심시간

직장인 점심시간 사용설명서

by 귤예지

서둘러 점심을 먹고 카페에 자리를 잡았다. 똑같은 명찰을 목에 건 사람들이 테이블마다 삼삼오오 모여있다. 수시로 터지는 웃음소리. 그야말로 화기애애하다.


이번 기수 분위기 좀 괜찮은데?

마음이 한시름 가벼워졌다. 저들은 우리 회사 신입사원. 점심시간이 끝나는 오후 1시부터 나는 저들을 대상으로 강의를 할 예정이다.


강의 일정을 통보받은 건 3주 전이지만 본격적으로 준비한 건 어제 오후부터였다. 퇴근 때마다 달력의 다음 날짜에 '강의 준비'라고 적어두고는 그다음 날이면 당장 기한이 닥친 일을 먼저 쳐내다가 또 다음날로 미뤄 탓이다.

여유를 부릴 수 있었던 건 주제가 익숙했기 때문이다. '우리 부서 사업소개'. 외부 고객들을 대상으로 여러 번 해본 강의라 자료며 스크립트며 특별히 준비할 필요 없겠지 싶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강의 전날 늦은 오후,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시점이 되어서야 강의자료를 들춰보는데, 어? 이건 좀 아닌데, 싶은 거다. 이미 우리 사업에 관심이 있는 플레이어들을 대상으로 하는 자료라 생략된 부분이 지나치게 많았다. 이제 겨우 대학을 졸업한 신입사원이 이해하기에는 너무 어렵고 무거운 구성이라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

자료에 없는 내용이라도 스크립트에는 최대한 담아보려 노력했지만, 퇴근 후에도 찝찝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결국 강의 당일 아침, 담당자들이 출근하기를 기다렸다가 각 사업 설명자료를 다시 모았다. 사업의 기초가 되는 개념부터 각종 통계, 사례들을 기존 페이지 사이사이에 살을 붙이듯 끼워 넣었다.

작업은 결국 오전 3시간을 꽉 채워서야 끝이 났다. 12페이지였던 강의자료가 45페이지까지 늘었다.

급하게 구성하느라 페이지마다 폰트도 다르고 배경도 달라졌다. 하지만 형식이 뭐가 중요해, 내용이 중요하지.

이 강의의 목적에 집중하기로 했다.


까마득한 후배들.

이제 막 합격해 모든 게 좋게만 보일 신입들.

내가 강의 중 뭔가를 빠트리거나 실수를 해도 눈치채지 못할 것 같은 친구들.

그래서 더 긴장이 되었다. 오늘 내 모습을 보며 후배들은 자신들의 미래 어느 시점을 상상할 거고, 내 강의를 들으며 앞으로 하게 될 일을 그려볼 것 같았다.

본인들의 미래가 꽤 재밌고 보람 있을 거라는 기대를 심어주고 싶었다. 자꾸 웃다 보면 웃을 일이 생기는 것처럼, 기대하다 보면 기대에 부합하는 미래가 나타날 수도 있으니까?

한 시간을 지루하지 않게 느끼길 바라는 마음에 퀴즈를 맞히는 사람들에게 줄 작은 선물도 몇 가지 준비했다. 어느 타이밍에 어떤 퀴즈를 내면 좋을지, 졸려할 때는 어떤 여담으로 분위기를 환기할지.

느긋한 점심을 포기하고 카페에 앉아, 내 강의를 들을 그들 사이에서 마지막으로 강의를 시뮬레이션했다.


신입들이 하나 둘 자리를 뜨기 시작했다. 곧 1시, 강의 시작 임박이다. 서둘러 짐을 챙겨 강의장으로 향했다.

반짝이는 눈빛들. 이 눈들에 입사 16년 차인 나는 어떻게 보일까.

여전히 배우고 아직도 실수하고 때때로 해야 할 일을 미루고 미루다 기한이 닥쳐서야 벼락치기하듯 허둥대기도 한다는 걸 저들은 알까?

아마 모를 것 같다. 나는 몰랐던 것 같다.

신입이었을 때, 선배들은 그저 대단하고 크게만 보였던 것 같다. 취업만 하면 모든 게 끝인 줄 알았던 그때, 입사 16년 차 선배는 이미 완성형 직장인이었다.


취업이 끝이 아니라 진짜 시작인 ,

대단해 보였던 선배들을 미워하는 날도 있고

간절했던 회사를 떠나고 싶은 날도 생긴다는 걸,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새로 들어오는 후배들에게는 꽤 괜찮은 회사의 멋진 선배로 보이고 싶은 마음이 든다는 걸, 저들도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되지 싶다.






keyword
이전 18화혼자 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