덥다.
너무 덥다.
주차장에 내려 건물까지 걸어 들어가는 100여 미터,
이 짧은 거리에 소매 밖으로 드러난 팔이 익어버릴 것만 같다.
마침내 사무실에 도착해서야
휴, 이제야 살겠다!
에너지 절감 정책 때문에 마트나 은행처럼 시원하진 않지만, 그래도 에어컨이 돌아가고 있는 게 어디야. 열받을 일이 생기지만 않는다면, 지금부터 더 시원해질 일만 남았다.
4년 전, 둘째를 임신 중이던 당시 내 꿈은 파이어족이었다.
두 아이를 키우며 9 to 6 근무에 야근과 출장까지 잦은 회사를 계속 다닐 자신이 없었다.
월급을 모으고 불려 자본금을 만든 후, 배당주에 골고루 투자해 현금흐름을 만들어두고 퇴사할 꿈을 꿨다.
퇴사 후 계획도 꽤 구체적으로 그려두었다.
아침에는 가족들을 위해 손수 아침밥을 준비하고, 남편과 두 아이가 나가면 수영장에 가서 가볍게 운동을 한 다음, 도서관에 가서 책을 읽거나 글을 쓴다.
오후에는 아이들 학교 근처에 얻은 작은 공부방으로 출근. 나처럼 워킹맘인 엄마를 둔 아이들을 모아 숙제를 봐주고, 책도 함께 읽고, 가끔 어린이 공모전을 준비하고,
간식으로는 편의점 샌드위치 대신 찐 고구마나 옥수수, 토마토주스를 주는 그런 공부방을 운영해야지 싶었다.
그로부터 4년이 지난 지금.
자본금은 계획처럼 쑥쑥 늘어주지 않았고, 생활비는 아이 하나일 때와 비교할 수 없이 늘었다. 그간 오른 물가 영향도 있지만 아이들이 자라며 씀씀이도 덩달아 커진 탓이다.
한편으로는 수영이나 책, 글쓰기를 일상에 조금씩 집어넣을 수 있을 만큼의 여유와 융통성도 생겼다.
그리고 무엇보다, 당장 회사를 그만두기에는 아쉬운 점이 꽤 많다는 걸 깨닫고 있다.
지금처럼 무더운 여름에는, 회사만 한 데가 없다.
내가 전기요금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에어컨이 돌아가고 자리마다 선풍기도 있다.
탕비실엔 시원한 얼음이 꽝꽝 얼어 있고, 주기적으로 관리되는 정수기도 있다.
취향껏 골라먹을 수 있는 간식들, 커피, 가끔 탄산과 주스까지.
미화 담당 여사님들이 매일 새벽마다 사무실을 돌며 휴지통을 비워주시고, 화장실도 더러워질 틈이 없다.
이게 다가 아니다.
회사에서는 1년에 한 번 건강검진도 시켜준다.
아침저녁으로 씻고 머리를 감는 데도 회사의 몫이 크다.
패션에 별 관심이 없는 내가 회사마저 다니지 않았더라면 옷도 사지 않고 후줄근하게 다녔겠지.
지각하지 않으려고 알람을 맞추고, 다음날을 위해 밤새 보고 싶은 드라마를 미룬다.
회사 덕분에 제법 규칙적으로, 부지런히 살고 있다.
회사에서 만난 사람들.
회사 덕분에 이어진 인연들.
내 생활을 가족이나 친구들보다 잘 이해하는 동료들도 회사로부터 얻은 소중한 선물이다.
무엇보다 이 모든 걸 돈을 받으면서 누린다.
회사는 매달 꼬박꼬박 정해진 돈을 입금해 준다.
이제는 다른 어디에 가서도 이 월급을 받을 수 있겠다는 확신이 없어서,
파이어족 대신 나는 오늘도 출근을 한다.
구내식당에서 영양사님이 준비해 준 맛있는 점심을 후다닥 먹고 사무실로 돌아왔다.
며칠 전 타 부서로 발령받은 부서장님께 스탠딩 데스크를 물려받은 걸 계기로 내 자리가 더 좋아졌다.
내 키에 맞춘 스탠딩 데스크 앞에 서서 오른쪽에는 차를 한잔 두고 책을 펼쳤다.
일을 하러 온 회사지만,
일하지 않는 순간에도 눈치 보지 않고 머물 자리가 있다는 사실이, 이 무더위에 세상 밖으로 던져지지 않도록 나를 보호해 줄 시원한 둥지가 있음이, 새삼 감사하다.
※ 개인적인 사정으로 10월 말까지 연재를 쉽니다. 제 글을 읽고 기다려주시는 분들께 너른 양해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