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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름끈 Sep 13. 2024

만년 영어 초보의 해외여행

Portugal 14) 영원한 숙제 영어 공부

* Sawu bona(사우보나) : 아프리카 줄루족의 인사말. '나는 당신을 봅니다'라는 뜻. *



 "왜 하필이면 포르투갈이에요? 이왕이면 영어권이 낫지 않아요?"


 매주 두 번씩 온라인에서 나에게 영어를 가르쳐주던 Raya가 물었다.


 영어와 무관한 직종에서 일하고 있는 나는 해외여행을 앞두고 언제나 언어에 대한 부담을 느낀다. 아득히 먼, 그래서 사실 모든 것이 흐릿하기만 한 고등학교 때의 지식으로 연명해야 하기 때문인데, 뭐 그렇다고 해도 별다른 준비를 하진 않는다. 현지에 도착해 손짓발짓까지 동원하면 그럭저럭 여행을 잘 끝낼 수 있다는 것을 여러 차례의 경험으로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귀국할 때는 조금만 더 영어를 잘했더라면 보다 많은 것을 느낄 수 있었을 거라고 매번 아쉬움을 느끼기도 한다.     



 그래서 이번에는 조금 다른 여행을 하고 싶었다. 코로나와 무기력증으로 여행 공백기가 길어져 영어회화에 대한 두려움이 더 커져서이기도 했다. 항공권을 구입한 후 바로 화상영어회화 수업을 신청했다. 레벨테스트 때부터 오랜 탐색 끝에 찾게 된 Raya와의 첫 대화까지 왜 영어를 배우려 하느냐는 질문을 연거푸 받았다. Raya는 이왕 마음먹고 영어를 배우는데 실력도 점검해 볼 겸 아예 영어권으로 떠나보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하기도 했다. 생각해 보겠다고 말했지만, 사실 그러고 싶지 않았다. 우습지만 모두가 쏼라쏼라 영어를 능숙하게 하는 곳에서 나 혼자 더듬더듬 서툰 영어를 내뱉고 싶지 않았다. 공항이나 호텔, 유명관광지, 식당 등에서는 최소한의 영어로 충분하다. 그 밖의 곳에서 마주치는 현지인들의 대부분이 나처럼 쑥스러워하며 매끄럽지 않은 영어 문장을 내놓는 상황이 훨씬 더 마음 편하다. 물론 서로 헤매는 일이 생길 확률도 높아지겠지만, 그래도 비슷한 입장에서 조각들을 얼기설기 엮어 가며 소통해 가는 시간이 주는 즐거움도 있으니까. 영어 공부를 열심히 하겠다며 화상강의까지 신청하는 사람치고는 묘하게 흐리멍덩한 자세이긴 하다.  


 아무튼 이런 느슨한 마음임에도 내가 Raya와의 대화를 7개월간 이어간 것은 입을 뗄 수 있는 용기를 얻고 싶어서였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완벽한 문장을 구성하지 못해 어... 음... 만 반복하면서 말하기를 주저하다 수업이 끝나곤 했다. 움츠러든 스스로가 한심해 보였다. '연습만이 살 길이다'를 외치며 예습에 매진하기 시작했다. 파파고의 도움을 받아 다음 시간에 할 말을 미리 완벽하게 영작해 두고 여러 번 반복해서 연습했다. 철저하게 준비된 말하기였다. 어쨌든 내가 문장으로 말을 뱉으니 수업 시간의 대화는 원활하게 이루어졌다. 문제는 내가 미리 한 영작문을 점검받는 수업일뿐이라는 것. 그리고 직장인의 타이트한 일상에서 복습만으로도 벅찬데 예습에도 긴 시간을 투자해야 하니 영어 공부가 점점 무거워져 자꾸 충동적으로 수업을 취소하게 되었다는 것. 영어 공부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가 들기 시작했다.  이 상태가 지속된다면 그냥 시간 낭비, 돈 낭비에 스트레스만 가득 안게 될 터였다.


영어 무지렁이는 외국인들 틈에 있으면 늘 조금 긴장한다.


고민 끝에 준비 없이 느슨하게 대화에 참여해 보기로 결심했다. 이런 게으른 성정으로는 어차피 단기간에 큰 성장을 이뤄내기 어렵다. 반드시 해야 하는 일도 아닌데 스스로에게 스트레스를 주면서 이럴 일인가. 내가 원했던 건 문법적으로 완벽하지 않아도 좋으니 외국인 앞에서 주저 없이 입을 뗄 수 있는 태도였던 걸 잊고 있었다. 비록 발전이 더디더라도 영어의 끈을 놓지 않고 계속 이어나가고 싶었다. 외국인 친구와 대화하는 시간, 수업을 그렇게 생각하기로 하고 예습과 복습을 멈췄다. Raya는 인내심이 많은 다정한 선생님이었다. 우리는 어떻게든 대화를 이어나갔고 서로의 일상을 가볍게 나누는 시간은 듬성듬성하지만 따뜻했다.


 포르투갈을 여행하며 언어의 장벽을 느끼는 순간들은 물론 있었다. 호텔 직원과의 소통 오류로 아까운 돈을 쓰기도 했고, 같은 자리를 맴도는 대화에 갑갑함을 느껴 꺼내든 번역앱 탓에 이야기가 더 깊은 수렁에 빠지는 일도 생겼다.


텍스리펀을 받겠다고 공항에서 얼마나 헤매고 다녔는지

 

 하지만 뭐 어떠랴. 길을 잃어도 결국은 목적지에 도착했고, 서로의 말을 다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우리는 웃으며 헤어졌다. 영어를 잘하지 못한다고 해서 그 누구도 나를 부족하게 보지 않았고, 어떻게든 서로에게 친절을 베풀려고 애썼다. 나의 미숙함을 가장 못 견디는 사람, 가장 매서운 채찍을 휘두르는 사람은 언제나 나였다.


 스스로의 서툰 모습에 조금만 더 너그러워지자. 그러면 이 여행이 더 큰 행복을 가져다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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