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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름끈 Sep 20. 2024

선 밖으로 한 걸음

Portugal 15) 에필로그

* Sawu bona(사우보나) : 아프리카 줄루족의 인사말. '나는 당신을 봅니다'라는 뜻. *


 23박 24일. 가장 길게 떠나본 해외여행이었다. 여행에서 돌아온 후 무엇이 달라졌냐고 묻는다면, 글쎄. 딱히 없다. 나는 다시 일상 속으로 뛰어들었고 매일 주어진 미션을 수행하느라 정신없이 살았다. 여행의 여운에 젖어 여행기도 일러스트도 금방 뚝딱 끝낼 줄 알았는데, 9월에서야 에필로그를 쓰고 있으니 말 다 했지. 뭐.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다시 항공권을 구매하고 다음 여행을 계획하고 있다. 4개월 뒤 나는 로마에서 한 달간 머무를 예정이다. 이 이야기를 하면 모두들 대단하다고 부럽다고 나를 추켜세워준다. 나는 대단할 게 뭐 있냐고 돈이 많이 들어 힘들다고 너스레를 떨어보지만 나의 표정이며 말투에는 은연중에 여행에 대한 설렘을 배어 나온다.




 

 사실 여행이 극적인 변화를 이끌어내는 일은 아주 드물다. 단 한 번의 여행으로 인생의 항로가 바뀌게 되거나 무언가 큰 깨달음을 얻는 일은 드라마에서나 볼 법한 것이다. 편안한 나의 집으로 도착하는 순간부터 여행은 아주 오래전 일처럼 느껴지고 나의 머릿속은 빠른 속도로 먹고사는 문제나 인간관계의 고민들로 채워진다. 여행을 하며 수많은 다짐을 했지만 나는 여전히 같은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다.


 그래도 분명히 성과는 있다. 일상으로 돌아온 나는 여행 전보다 나 자신을 조금 더 이해하게 되었으니까. 나는 낯설고 어려운 상황에서 이렇게 대처하는 사람이구나, 이런 순간들에 행복을 느끼는 사람이구나, 이런 것을 못 견디는 사람이구나. 이 나이가 되어서야 나는 내가 궁금해졌다.


포르투의 노을


 나는 원래 익숙한 것에 편안함을 느끼고 통제되지 않는 상황을 힘겨워한다. 능숙하게 일을 처리해 낼 때 스스로를 가치 있다고 생각한다. 다른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면 그것을 부풀려 생각하고 어떤 방식으로든 갚으려 한다. 사실 나는 무던하기보다는 까칠한 부류의 사람이다.


 여행은 이러한 나의 질서를 아주 손쉽게 무너뜨린다. 의도했던 대로 흘러가지 않는 상황은 당연하고, 나는 자주 평정심을 잃고 당황하기 일쑤이다. 하지만 여행에서는 그래도 괜찮다. 여기서는 능숙하지 않은 게 당연하니까. 그래서 어이없는 실수를 해도 오래 자책하지 않고 사소한 행운에도 크게 기뻐하게 된다. 당장 오늘 하루를 무사히 그리고 즐겁게 살아내는 것이 가장 중요한 화두이므로 잡생각들에 덜 휘둘리게 된다.


마지막날 호텔에서 본 풍경


 나는 그곳에서 일상으로 가져다 놓고 싶은 마음가짐들을 발견했다. 어떤 일이든 충분히 벌어질 수 있음을 받아들이며 유연함을 잃지 않는 것, 내가 아는 세계가 전부가 아니니 함부로 속단하거나 평가하지 말 것, 힘든 상황에서도 웃음 짓게 만들어 주는 소박한 즐거움을 찾아내는 것, 지금 이 순간을 귀하게 생각하는 것.


 그래서 앞으로도 나는 떠날 것이다. 여행자가 누릴 수 있는, 저 단순하면서도 부드럽고 가벼운 삶의 방식들이 서서히 내 안에 자리 잡게 만들고 싶으니까. 스스로를 보호하겠다는 명목으로 그어둔 선 밖으로 용기 있게 한 걸음 내디뎌 보기, 그것이 바로 내 여행의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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