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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ickypinkpiggy Feb 26. 2021

깊은 우물을 오랫동안 들여다보는 소년

무라카미 하루키 - 『노르웨이의 숲』(상실의 시대)

  소설을 끝까지 읽은 후 첫 장을 다시 읽었다. 스물 언저리의 청년이 서른 여덟 살이 되어 나오코와 함께 거닐었던 노르웨이의 숲을 회상하는 장면이었다. 나오코는 깊은 우물에 빠져 다른 사람이 구해주길 기다리는 삶이 즉사하는 것보다 비참할 것 같다고, 와타나베와 함께라면 그런 우물에 빠지지 않을 것 같다고 말한다. 이에 와타나베는 영원히 함께 있어 주겠다고 다짐하듯 답하지만 나오코는 '영원히'란 불가능하다고 단호하게 선을 긋는다. 대신 자신을 기억해달라고 부탁한다. 와타나베는 그녀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나오코의 자살 후 이 글을 적는다. 돌이켜볼수록 당시엔 알아차리지 못했던, 선명해지는 무언가가 있음을 느낀다. 나오코는 그를 사랑하지 않았다.


  인생은 깊은 우물이 길 군데군데 숨겨져 있는 숲을 거니는 것과 같다. 누군가는 그곳에 빠질 테고, 누군가는 비명을 방관하며 자신의 길을 급히 떠날 테고, 또 다른 누군가는 깊은 우물 속에서 죽은 사람을 평생 마음속에 지니고 살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우물 속으로 사라져버리는 날엔 새로운 깨달음이 오고, 그 진리를 덮는 거대한 슬픔이 휘몰아친다. 우린 그러한 와중에도 뒤틀린 부분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과 마음을 나누거나 새로운 사랑을 하며 함께 걸을 사람을 찾아야 한다.


  나오코는 친언니의 자살 뒤 깊은 우물 속에서 누군가 구원해주길 기다리는 삶의 형국이 이어졌다. 오랜 친구이자 남자친구였던 기즈키의 자살 이후 그녀는 더욱더 깊은 수렁으로 빨려 들어간다. 이 시간을 마찬가지로 고통스럽게 보냈을 기즈키의 오랜 친구인 와타나베에게 제 죽음으로 그 경험을 재현하고 망각의 기회를 박탈하는 건 잔인하다. 이는 뒤틀림에서 비롯된 이기심이다. 나오코가 와타나베를 사랑했다면 그가 짊어질 죄책감과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와줬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을 잊지 말아달라고 부탁하며 비참하게 우물 속으로 몸을 던지는 나오코를 상상하면 그녀를 비난하기는 힘들다.


  와타나베는 기즈키, 나오코 등 사랑하는 사람들을 차례로 상실하며 죽음, 즉 누군가 빠져 죽었을 깊은 우물이란 길 저편 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늘 자신과 함께 이편에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 우물 속을 들여다보는 건 처음이 아니더라도 늘 처음처럼 괴롭고 이를 통해 뭔가 깨닫더라도 그런 진리는 아무 소용 없이 아프기만 하다. 이런 와타나베에게 레이코 씨는 행복해질 기회가 있으면 무조건 그 기회를 잡고 행복해져야 한다고 충고한다. 이는 깊은 우물을 들여다볼 때 그곳에 빠진 사람을 보며 느껴야 할 어느 정도의 죄책감과 자신의 행복감을 분리하는 것의 중요성을 암시한다. 와타나베가 미도리를 사랑하는 것, 그래서 미도리와 함께하고 싶은 것은 나오코를 사랑해서 그녀의 자살로 인해 느꼈던 죄책감, 고통, 괴로움과 분리해야 한다. 그는 나오코와 약속을 지키기 위해 그 고통을 잊지 않고 성실히 우물 속을 들여다보지만 동시에 제 행복을 위해 미도리와 함께 할 자격이 있다.


  끝없는 심연과 같은 우물을 오랫동안 들여다본 후에 다시 일어나 걷는 힘은 다시 행복해지려는 용기 속에 가능하다. 그런 용기를 지녀야 사랑하는 사람을 집어삼키는 깊은 우물을 지닌 숲속을 계속 걸을 수 있다. 청춘은 그 방법을 배우는 시간이다. 타인의 생각에 대한 상상력을 기르며 관계 속에서의 자신과 상대방을 이해하고 자신을 향한 관심을 다른 사람에게로 쏟아내는 법을 배우는 시간이기도 하다. 그 시간을 통과해낸 우리는 서로의 뒤틀린 부분을 인정하고 이해하며 함께 걷는 사람이 우물에 빠지지 않도록 돌볼 수 있다. 처음 이 과정을 겪을 때 우린 서툴고 편협하고 필연적으로 많은 것을 상실하지만 그래서 청춘은 순수하다. 와타나베가 겪은 상실의 시대는 본디 순수의 시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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