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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ickypinkpiggy Feb 20. 2022

정상성이라는 착각

김초엽, 김원영 - 『사이보그가 되다』

장애 담론에 대해 이야기하려면 장애와 비장애의 상태에 관해 생각해봐야 한다. 비장애의 상태, 그중에서도 장애가 아주 없는 '표준적인 비장애'란 무엇일까? 과연 그런 게 존재하긴 하는 걸까?『평균의 종말』에 따르면 평균적인 체형에 부합하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으며 누구나 저마다의 오차범위를 갖고 있다. '표준성'은 환상에 불과한 것이다. 그렇다면 비장애를 둘러싸고 구성된 정상성의 규범 역시 착각에 불과한 게 아닐까? 누구도 정상성에 부합하지 않으면서―사실 정상성이란 게 실재하긴 하는지조차 의구심이 들지만―자기보다 더 큰 비정상을 가진 것처럼 보이는 사람을 동정하고 멸시하고 싶어서 그런 규범을 막연히 믿는 것 아닐까? 그런 태도는 자칫 자신의 기준만으로 타인의 개성을 교정하고 말살하려는 행위로 나아갈 수 있다. 장애인을 시혜의 시각으로밖에 바라보지 못하는 것 역시 그런 태도의 발로다. 「사이보그가 되다」는 이와 같은 정상성의 규범에 의문을 제기하며 장애를 '교정의 대상'이 아닌 '정체성의 일부'로 바라볼 수 있도록 돕는다.


누구나 저마다의 결핍과 결함이 있다. 완전성 역시 정상성만큼 허상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그 결핍의 가시성이다. 누군가의 결핍은 내면적이라 눈에 띄지 않지만 누군가의 결핍은 더 눈에 띄게 드러나는데, 그 예로 보조기구인 휠체어 등을 이용하는 장애인이 있다. 또한, 그들의 결핍은 단순히 눈에 띄는 보조기구 때문뿐만 아니라 그들을 배제한 채 설계된 많은 시설과 제도 때문에 더욱 도드라진다. 예를 들어, 이 책에서는 빨대와 관련한 담론이 나온다.


"플라스틱 빨대의 퇴출이 장애인의 권리와 상충할 수 있다는 문제 제기는 몇 년 전부터 이미 있었다. 장애 가시화 프로젝트를 이끄는 활동가이자 프로듀서인 앨리스 웡은 최후의 빨대라는 에세이를 한 매체에 기고했다. 당시 북미의 여러 도시들에서는 플라스틱 빨대 퇴출 계획을 하나씩 발표하고 있었다. 앨리서 웡은 환경운동가들에게 빨대는 마음먹으면 포기할 수도 있는 물건이기 때문에 편리함을 포기하고 환경을 생각하자는 운동의 시작점으로 여겨지지만, 노약자나 장애인들에게는 식음료를 섭취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삶의 도구라고 말했다. 웡에 따르면 일회용 빨대 제공을 금지한 북미의 도시들도 장애인에게 빨대를 제공하는 것은 예외 조항으로 두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개별 매장에서는 이러한 예외를 제대로 숙지하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고백하자면, 이 책을 읽기 전까지 플라스틱 빨대를 환경 담론 이외의 시각에서 바라본 적 없다. 플라스틱 빨대를 퇴출해야 한다고만 생각했지, 그 퇴출이 도리어 누군가를 식음료 문화에서 배제하는 일이 될 것이라고까지는 상상하지 못했다. 부끄럽지만, 내가 알지 못하는 타인의 사정을 헤아리는 능력이 내게도 결여된 것이다. 이처럼 장애인의 결핍은 가시적이란 특징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담론에서 그 존재감은 곧잘 지워진다. 그들이 소수자이기 때문에 벌어진 아이러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그들의 정체성을 정상성의 규범에서밖에 바라보지 못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지금껏 자신이 살아온 환경에 어떤 의구심도 가져보지 않은 사람은 자신이 정상이라는 착각 속에서 살기 마련이고, 자신이 속한 그 정상의 상태에 다른 비정상인 사람들이 맞춰야 한다고 착각할 테니까.


빨대 담론을 환경적 시각뿐 아니라 소수자의 시각에서 바라보는 일은 그 착각에서 벗어나 다른 세계를 마주하는 일이다. 이 담론에 누가 배제되어있는지 알아차리고 그들을 초대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러니 그 착각에서 벗어나려면 더 많은 담론에 소수자가 개입돼야 한다. 그럴 때 우린 납작한 정상성의 환상 속에서 벗어나 그들의 소수성을 입체적인 개성으로 바라볼 수 있다. 교정되어야 하는 건 그들의 장애가 아니라 그들을 배제한 사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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