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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록가방 Nov 18. 2018

당신의 이야기는 지금도 진행 중

<빨간 머리 앤>

<빨간 머리 앤(Anne of Green Gables)> 초판본


난 여자 아이를 키울 생각은 꿈에도 해 본 적 없어요.

<빨간 머리 앤>, 공주니어, 18쪽


  <빨강머리 앤>은 일 도와줄 남자아이를 입양하려 했던 커스버트 남매가 실수로 웬 빨간머리 소녀를 집에 들이며 시작된다. 빼빼마른 몸, 빨간 머리, 주근깨투성이. 거기다 책의 묘사에 따르면 '무언가 평범하지 않은 영혼이 깃들어 있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하는 앤이 에이번리 마을에서 보내는 날들은 예사롭지 않다. 친구에게 실수로 포도주를 먹이는가 하면 바닐라 대신 진통제를 넣은 케이크로 손님을 대접해 곤혹스러워한다. 그녀는 말이 많은 데다가 엉뚱하고 실수투성이지만 누구보다도 상상력이 풍부하고 솔직하며 다른 사람에게 사랑을 베풀 줄 아는 아이이기도 하다. 앤이 말썽을 부려도 에이번리 사람들이 그녀를 미워하지 못하고 오히려 좋아하게 되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톡톡 튀는 소녀 '앤 셜리'가 커스버트 남매의 초록지붕 집에 살게 되며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성장해가는 소소한 이야기는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원작 소설의 인기를 바탕으로 드라마와 애니메이션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우리나라 역시 역시 최근에 앤을 내세운 에세이집이 나와 인기를 끌었을 정도다. 앤이 이렇게 오랫동안 많은 사랑을 받은 비결은 무엇일까? 아주 어릴 때는 의아했다. 사실 빨간 머리 앤을 처음에는 별로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본 후지TV에서 제작한 <빨간머리 앤> 애니메이션 


 <빨간 머리 앤>을 알게 된 건 소설보다 애니메이션이 먼저였다. 애니메이션 <빨간 머리 앤>은 줄글로 된 책이 아닌 그림책이 익숙하던 시절부터 엄마가 즐겨 보시던 작품이었는데 나는 텔레비전에서 <빨간 머리 앤>을 볼 때마다 늘 못마땅했다. 특별한 이유가 있었다기보다는 그저 재미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 시절 나에게 '재미있는 만화'란 모름지기 비밀을 간직한 변신소녀가 나와 특별한 능력으로 적을 물리치는 작품들이었는데 <빨간 머리 앤>은 시골 마을에 사는 평범한 소녀의 일상 이야기이니 재미있을 리가 없었다. 


 재미가 없다며 외면하던 <빨간 머리 앤>을 새롭게 보게된 건 유년시절의 끄트머리에서였다. 시공주니어에서 나온 앤 시리즈, <빨간 머리 앤>, <에이번리의 앤>, <레드먼드의 앤> 모두 흥미진진하게 읽었던 기억이 난다. 모험과 환상만을 추구하던 아이도 어른이 되어가며 현실에서의 삶과 일상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다. 나 역시 초등학교 고학년 무렵 그런 과정을 겪으며 앤에게 빠져들었다. 그 때는 내가 앤과 비슷한 또래였기에 앤이 단짝 친구 다이애나를 사귀는 이야기, 실수를 하는 바람에 마닐라 아주머니께 혼나는 이야기 등에 공감을 하며 읽었다. 변신소녀보다 앤에게 더 공감할 수 있게 된 다음에야 나는 왜 그렇게 사람들이 앤을 사랑하는지 알 수 있었다. 


 이 때 만났던 앤도 충분히 특별한 아이였지만 그 뒤로 <빨간 머리 앤> 후속편들의 존재를 알게 되면서 앤이 이전과는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많은 이야기들은 우리 모두 알고 있지만 애써 외면하는 사실을 감추고 있다. 바로 모든 사람들의 결말은 다름 아닌 죽음이라는 것. 대부분의 이야기들은 인물을 등장시킨 후 그 인물의 어느 한 순간, 인물이 겪는 특정 사건을 강조해 보여준다. 이야기 속에서 인물은 고정된 시간대에 고정된 모습으로 영원히 살아 숨쉰다. 그러나 <빨간 머리 앤>은 다르다. 사람들에게 가장 많이 알려진 작품은 앤의 유년시절을 다룬 <빨간 머리 앤>이지만 사실 후속편이 여러 개 있다. 내가 읽었던 <에이번리의 앤>, <레드먼드의 앤>이 앤의 대학생활과 앤이 길버트의 청혼을 수락하기까지의 내용이라면 <윈디 윌로어스의 앤>, <앤과 꿈의 집> 등 이어지는 후속편에서는 길버트와 결혼한 앤이 아이들을 낳고 나이가 들어가는 모습까지 볼 수 있다. 소설 속에서 앤은 지극히 현실적인 삶을 이어가는데 앤이 첫번째로 낳은 아이는 태어난 당일 죽고 셋째 아들은 1차 세계대전에서 전사하는 등 너무 현실적인 나머지 잔인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상상력 넘치는 아이가 주인공인 작품이 주인공의 상세한 삶을 서술함으로써 의외로 독자가 상상할 여지는 많이 남겨두지 않았다는 점이 아이러니다. 덕분에 앤의 이야기는 소설이 아닌 실제로 태어나 살다 죽은 인물의 전기(傳記)를 읽는 것 같다. 그 속에서 우리는 우리와 다를 바 없이 평범한 한 사람의 이야기를 본다.


앤은 언제나 그날 밤을 잊지 못했다. 평화로운 아름다움과 유쾌한 고요함이 충만했던 은빛의 그날 밤을. 그것은 앤의 인생에 슬픔이 찾아오기 전의 마지막 밤이었고, 일단 그 차갑고 신성한 슬픔의 손길이 스쳐 간 이후부터 앤의 인생은 다시는 그 전과 같을 수가 없었다......

390쪽


 오랜만에 다시 <빨간 머리 앤>을 읽으며 나는 많이 울었다. 다시 고아원으로 돌아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떠는 앤을 보며, 매슈 아저씨의 죽음에 충격을 받은 나머지 하루종일 울지도 못하다가 밤이 되어서야 울음을 터뜨리는 앤을 보며 어릴 때 읽었던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게 앤의 감정이 절절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어린 앤의 나이를 훌쩍 넘어선 나는 판타지가 아닌 현실의 삶이야말로 예측할 수 없는 일 투성이라는 걸 실감하고 그 가운데서 느낄 수 있는 기쁨과 슬픔을 알게 되었다. 물론 현실은 냉정하다. 작품에서 매슈 아저씨가 심장마비로 갑작스럽게 죽는 장면이나 후속편에서 앤이 길버트와 결혼해 아이를 낳고 늙어가는 모습을 떠올리면 삶이 허무하게 느껴진다. 소설을 읽는 이유 중 하나는 그런 삶의 허무함을 조금이라도 극복해보기 위함인데 앤을 생각할 때마다 역시 삶은 허무하다는 결론이 나온다.


 자연스레 '결국 이 세상에서 사라질 우리는 무엇을 남길 수 있을까'라는 질문이 떠오른다. 나는 그 물음에 이야기가 남는다고 답하고 싶다. 우리가 소설 속 인물이 아니더라도, 매일이 특별하지만은 않더라도 삶은 처음과 끝이 있고 각각의 '나'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는 점에서 이야기이다. 앤의 평범한 삶이 이야기가 되었듯 우리의 삶 역시 누군가에게는 이야기가 된다. 당신의 이야기, 나의 이야기는 오늘도 진행 중이다.




이 글은 온라인 문화예술 정보전달 플랫폼,아트인사이트에서 연재되었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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