샌프란시스코를 다녀와 밀린 일을 하느라 그다음 날은 하루 종일 에이스트림에서 꼼짝을 하지 않았다. 드디어 내가 꿈꾸던 에어스트림 칩거 생활이라 조금도 답답하지 않았다.
가장 행복한 시간은 창가에서 정원을 바라보며 커피를 마시는 시간이었다. 한국 시간에 맞춰 줌 미팅도 해야 했고, 밀린 글도 써서 보내야 해서 시원한 에어컨 바람에 푹신한 침대와 소파를 오갔다.
수십 년 시각 디자이너 생활을 거쳐 지금은 개인 디자인 회사를 운영하는 M도 밀린 제품 오더를 처리하느라 바빠 나를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다음 날 멀트노마 폭포(Multnomah Falls)를 가기로 일정이 잡혀 있었고, 아침 주차장에서 만나는 시간까지 이미 정했기 때문에 딱히 서로 할 말이 없었다. 이렇게 알아서 내버려 두는 공통점이 까다로운 M과 내가 잘 지내는 이유인지도 모른다.
M의 집은 포틀랜드 숲 속에 있지만, 꼼꼼한 MS가 총괄 관리하는 시스템이 잘 갖춰져 있다. 나는 M 부부에게 이 숲 속에서 전기는 어떻게 쓰는지, 물은 어떻게 쓰는지, 통신은 어떻게 되는지 물어 이 집이 이토록 멋지게 가동되는 시스템을 어느 정도는 파악할 수 있었다.
특히 정원의 연못은 MS가 동양식으로 디자인한 연못이었는데, 작은 폭포도 있는, 내 기준으로는 가히 세계적인 조경상을 수여할만한 역작이었다.
이 연못에는 알버트라는 이름을 가진 오리 한 마리가 살고 있었는데, 혼자 놀기의 달인이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인데 밤에 코요테가 와서 그의 여자 친구가 코요테의 뱃속으로 들어가는 바람에 혼자가 되어 버린 것이었다. 알버트는 비자발적 아웃사이더였다.
나는 알버트가 심심할 것 같아, 어차피 아웃사이더끼리는 같이 있어도 편할 것 같아 가끔 연못의 테이블에 가서 커피를 마시거나 삶은 계란으로 아침을 먹고 돌아오곤 했다. 아쉽게도 메리 농장에서 가져온 계란 숫자는 조금씩 줄어들고 있었다. 떠나는 날까지 아껴 먹기로 했다.
에어스트림에서 내가 혼자 꼬물거리며 지낼 수 있었던 것은 틈틈이 M이 수급해 준 우량 식재료 덕분이었다. M은 식재료의 품질을 꼼꼼히 따져서 장을 보는 레이디였기에 M이 바구니에 담아 가져다주는 식재료가 다 맛있었다.
나는 가끔 M의 동정심을 유발하기 위하여 배가 고파서 마당의 블루베리를 뜯어먹었다거나, 풀떼기를 먹었다는 등 썰렁한 농담을 해서 M을 웃겨주고 그 품삯으로 음식을 맛있게 받아먹는 일에 재미를 붙여가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나는 포틀랜드의 맥주가 정말 맛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는 평소에 맥주를 좋아하지 않았다. 배만 부르고 맛이 없으며 이내 거품이 사그라드는 씁쓸한 음료 정도? 맥주 공장 굴뚝 가까이에서 땀을 흘린 후 먹는 것이 아니면 다 그렇고 그런 맛이라 폄하하던 맥주가 너무나 맛있는 것이다!
알고 보니 포틀랜드의 날씨와 기온은 맥주뿐 아니라 품질이 뛰어난 와인 생산에 최고의 조건이다.비가 많이 오고 계절 간 기온 차이가 큰 기후 덕분에 포도, 홉, 보리를 재배하기에 이상적인 환경이다.
그래서인근의 윌라멧 밸리(Willamette Valley)는 피노 누아(Pinot Noir) 생산지로 명성이 높고, 독특한 떼루아르가 반영된 맛을 자랑한다. (나파의 헤스 와이너리에서 배운 단어, '떼루아르'를 여기서 써본다)
이렇게 포틀랜드의 맥주와 와인 맛이 좋은 이유는 이 도시의 자연환경, 문화적 배경, 그리고 지역 사회의 힘과 무관하지 않다. 포틀랜드는 미국에서도 크래프트 비어의 중심지로 손꼽히는 도시다. 소규모 브루어리 양조장이 촘촘히 밀집된 물 좋은 도시!
개방적이고 진보적인 도시 포틀랜드에서는 각 양조장이 독창적인 레시피와 지역 특산 재료로 새로운 맥주를 끊임없이 선보일 수 있게 그 뒷심이 되어주고 있었다. 크래프트 비어는 기본적으로 호기심이 많고 실험정신이 강한 나라에서 발달하기에, 그를 뒷받침하는 커뮤니티가 있다는 것 역시 포틀랜드의 자부심이겠지.
포틀랜드는 로컬과 지속 가능성을 중시하는 도시인만큼, 양조장과 와이너리에도 이러한 가치를 반영하고 있다고 한다. 지역 재료를 사용하고 친환경적인 생산 방식을 추구하고, 다양한 맥주나 와인 페스티벌이 열리니 선순환이 되어 지역 경제와 양조 산업의 성장을 더욱 촉진시키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M이 집에서 가져다준 이 Steeplejack 맥주는 포틀랜드에서 시작된 크래프트 IPA다. 노스웨스트 IPA 맥주로 구분하는데, 홉이 강렬하고, 시트러스, 파인애플, 트로피컬 과일 향이 홉의 쌉싸름함을 깔끔히 마무리해 준다. 살짝 캐러멜 맛도 난다. 이 양조장은 포틀랜드의 역사적인 교회를 개조한 공간으로도 유명하다니 언젠가 반드시 독특한 양조장 분위기 속에서 마셔보리라는 소망을 버킷리스트에 넣어둔다.
또 하나, 포틀랜드에 와서 나는 이곳 유제품이 맛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나는 체질상 유당 분해를 잘하지 못해 우유, 치즈, 크림 같은 음식을 좋아하지 않았다. 커피도 무조건 아메리카노.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M이 장바구니에서 나에게 맛보라고 이 치즈를 주었는데 너무나 맛있는 것이다! 어느 날은 기분이 좋았는지 시원하게 수박까지 썰어다 주어서 수박에 이 치즈를 올려 먹어보았다. 귀에서 종소리가 들렸다.
이 치즈 이름은 Petite Truffle Triple Crème Brie. 치즈 브랜드 Marin French는 1865년에 캘리포니아에서 창업한,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치즈 회사 중 하나다. 트러플의 깊고 흙내 나는 풍미가 크림치즈의 부드럽고 고소한 맛과 조화롭게 어우러진 맛을 내는 것이다. 이 치즈를 수박에 올려 먹으니 수박의 사각거리는 질감과 진득하고 부드러운 크리미 한 치즈 맛이 어우러져 입안에서 향연을 이룬다.
이 치즈는 냉장 보관했다가 서빙 전 약 30분 정도 상온에 두면 최상의 크리미 한 질감을 느낄 수 있다고 한다. 여름날 슈퍼에서 사서 집으로 오는 동안 자동차로 30분 걸렸으니 이 치즈는 최상의 숙성 상태로 나에게 온 것이다. 수박치즈 2단 공법은 내가 생각해도 천재적인 발상이 아니었나 싶다. 참고로 나는 과일도 먹지 않는데, 나는 절대 미각이 있는 것이 분명하다. 음...
나는 날이 갈수록 에어스트림에 앉아 실험에 돌입했다. 1, 1+1, 1+1+1으로 난이도를 높여가면서. 이미 헤스에서 입을 높여 놓았기에 기대를 별로 하지 않았던 슈퍼마켓 와인과 M이 준 치즈. 아예 내게 가져다주는 음식 보냉백이 생겼다.
이번에 맛본 치즈Saint André Brie Triple Crème은 프랑스에서 생산되는 고급 트리플 크림 브리 치즈다. 일반 브리보다 크림 함량이 높아 더욱 부드럽고 맛이 풍부하다. 표면의 부드러운 흰색의 곰팡이 껍질과 버터 같은 속살. 약간의 짭조름함으로 마무리한다. 와우!
진한 풍미 치즈에 시원하게 냉장고에 넣어두었던 전날의 소비뇽 블랑 와인 한 모금. The Jack Sauvignon Blanc 2022이다. 워싱턴 주의 콜럼비아 밸리(Columbia Valley)에서 온 캐주얼한 와인이라고 슈퍼 직원이 추천해 준 와인이다.
상쾌하고 가벼운 소비뇽 블랑이기에 페어링 음식은 식감이 있는 그릴 야채나 크래커가 좋다고 했었지. 겉면이 딱딱한 이 브리 치즈와 같이 맛보니 그만이다. 바게트 하나 사서 부드럽게 발라 먹고 싶지만, 이 캠핑카 밖에는 편의점 하나 없고 배고픈 코요테가 있을 뿐이다.
이 와인은 캘리포니아 와인인 Joel Gott Sauvignon Blanc 2022이다. 열대 과일 향, 특히 파인애플, 패션프루트, 그리고 라임이 상큼하게 느껴진다. 사과향, 구스베리 향도 스치고 지나간다. 입에서 계속 과일맛을 내다가 툭상쾌한 산미를 남기고 시크하게 가버리는 엔딩. 두 와인 모두 10불 아래다. 와이너리들이 좋은 와인을 합리적인 가격에 제공한 덕분이다.
포틀랜드 슈퍼에서 와인을 사는 제일 좋은 방법은 방법은 직원에게 포틀랜드 와인을 추천받는 것이다. 어떤 맛을 좋아하느냐고 물을 것인데, 내 경우에는 달지 않으며, 과일향이 풍부한 가벼운 바디감의 와인을 좋아한다고 말하면 실패하지 않았다. 꼭 여기 지역 와인을 마시고 싶다고 강조해야 한다. 아주 진심으로 골라준다. 다음에는 이것을 마셔보라고 웨이팅리스트도 정해준다. 기어코 여기 와인 마시겠다는 관광객이 얼마나 이쁘겠는가. 부산 슈퍼에서 대선 찾는 외국인이니.
캠핑카에 들어간 히키코모리에게 "대체 뭐 한다고 안 나오냐"고 물을 필요가 없다. 나름 바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