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 독일의 한 도로에서 접촉사고가 발생합니다.
사건 신고를 받고 현장을 조사하기 위해 도착한 경찰에게, 차주는 "개가 갑자기 도로로 뛰어들어서 아슬아슬하게 피했는데, 그 개는 신원을 확인할 겨를도 없이 도망쳐 버렸다"고 주장하죠.
경찰은 이 진술을 근거로, 손상된 차의 앞부분에서 1~2cm 길이의 개털 3모를 채취합니다.
차주는 물론 그 털이 용의자…… 아니, 용의견의 털이라고 주장하며 소송을 준비합니다.
교통사고의 원인으로 지목된 개는, 인근 상점에서 기르고 있는 한 저먼 셰퍼드였습니다.
차주는 사고가 일어날 당시 자신이 목격했던 개도 저먼 셰퍼드였다는 점, 사고 현장으로부터 개가 사는 곳이 가까운 거리라는 점, 그리고 사고가 일어난 날짜에서 며칠 지나지 않아 그 개가 가벼운 부상을 치료하기 위해 동물병원에서 진료를 받은 기록이 있다는 점을 근거로 상점 주인에게 소송을 제기합니다.
상점 주인 역시, 영문도 모르고 현장에 간 적도 없는 교통사고에 대한 피해를 보상하라는 황당한 소송에 대해 과학수사를 요청하게 되죠.
이렇게 해서 현장에서 채취된 개의 털, 용의견으로 지목된 개의 털 모두가 독일 마인츠에 위치한 법의학 연구소로 보내지게 됩니다.
연구소에서는 평소에도 범행 현장에서 채취된 용의자의 체모, 체액 등을 일상적으로 분석했겠지만, 사람이 아닌 개의 포렌식 데이터를 식별해달라는 요청은 당혹스러웠을 겁니다.
그래도 연구진은 일단 개의 털 속에 포함된 미토콘드리아 내부 mtDNA를 추출하고, 개 DNA 데이터베이스를 참조해 특정 부위(D-loop)에서 일곱 군데의 염기서열 위치를 선정해 비교합니다.
두 개털을 비교한 결과에 더해, 혹시 모를 실험 결과의 편향이나 오류를 방지하기 위해 지원견 가운데 무작위로 선정한 4마리 개의 털까지 대조군으로 비교하고 최종적인 결과를 내놓게 됩니다.
이 흔치 않은 과정들은 케이스 리포트가 되어 국제 법의학 저널에 실리게 되는데요.
결론적으로 용의 선상에 오른 개털과 현장에서 채취된 털의 염기서열은 서로 큰 차이를 보였고, 차주는 이 사실을 확인하고 소송을 철회함으로써 사건은 종결됩니다. 법의학의 도움을 얻어 누명을 벗게 된 셈입니다.
이 특이한 사건기록은 이후 다른 법의학 관련 논문과 교과서 등에 수십회씩 인용되며 공식적인 사료로서 나름의 가치를 인정받게 되는데요.
학술적으로는 의미 있는 사건이었으나 맥없이 끝난 소송전(?)이기 때문인지 외신에는 별로 화제가 되지 못한 모양으로, 이후의 경과는 찾아볼 수 없는 상태입니다.
위기를 벗어난 저먼 셰퍼드는 남은 여생을 편하게 지냈을까요?
그리고 과학기술의 발전이 반려동물과 관련한 법적인 분쟁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할 수 있을까요? 자못 궁금해지는 부분입니다.
※ 본 콘텐츠는 양이삭 수의사(yes973@naver.com)가 노트펫에 기고한 칼럼을 바탕으로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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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김승연 <ksy616@inbnet.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