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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에서 같은 말도 고급지게 보이는 방법

지명으로 떡상하는 화술의 위대함

by 초맹


오피스 게임의 초고수는 지명을 읊는다.


회사에서 보고나 대화를 할 때, 우리는 명확하게 설명하려고 애쓴다. 정확한 워딩, 자세한 직접 화법을 선호한다. 오피서들이 많이 빠지는 함정이다. 직접 언급을 하다 보면 실수가 생긴다. 부연설명이 길어진다. 중간에 버퍼링과 로딩중이 걸린다. 시간이 늘어진다. 없어 보인다. 싼티 난다. 이것이 바로 정확함의 함정이다.


분명 교과서에는 업무지시나 보고는 명확하고 자세하게 하라고 되어 있다. 교과서는 이상을 말한다. 초맹은 현실을 말한다. 이상은 다가오지 않기 때문에 이상이다. 다가오지 않아야 계속 이상으로 남는다. 때문에 교과서의 가치는 계속되고 잘 팔린다. 그래서 이상하다.


'분명 자세히 잘 설명했는데, 왜 하면 할수록 점점 꼬여가는 느낌이 들지?' 이런 생각해 본 적 있지? 고수들은 생각보다 직접 언급과 자세한 설명을 하지 않는다.


사람은 모든 경우의 수를 다 예측할 수 없다. 설득과 보고는 30분을 넘기면 실패다. 말은 꼬리가 길어지면 없어 보인다. 그리고 그 사람의 수준으로 각인된다.


성북동 지시사항입니다. "뭣이??"


"지시가 어디서 내려온 건지 확실하지는 않은데, 회장님 쪽인지 아니면 제니 부사장님 일수도 있습니다. 사업 방향에 대한 얘기가 있었다고 합니다. 내수만 보지 말고 수출을 같이 하라는 그런 의미로 보입니다. 장거리 포워딩이 현재 어렵기 때문에, 근거리 에어 가능한 곳이 현실적이지 않겠나 싶기도 하구요."


자. 어떤가? 정확함과 자세함을 추구한 나머지 말하는 이도 제대로 설명을 못한다. 듣는 사람은 뭘 어찌하란 말인가? 시간만 간다. 짜증 난다. 결국 다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다. 대부분 하수나 중수까지의 패턴이다.

"도쿄를 때리라는 사업 방향 선회 건입니다. 성북동 지시사항입니다."

끝났다. 모든 것이 다 함축되어 있다. 못 알아들으면 바보로 비춰진다. 아무도 반박하지 못한다. 세부설명이 필요하면, 물어보는 것만 대답하면 된다. 필요 이상의 정보는 절대 금물이다.


삽시간에 상대의 반론을 저지하는 법. 긴 시간을 들이지 않고 끝내는 법. 짧지만 임팩트 오지게 주는 법. 없지만 있어 보이는 법. 이 중점 키워드는 함축, 요약 그리고 하나 더! 바로 지명이다!


땅따먹기 시대부터 계속되어 온 인간 특유의 본성을 자극한다. 뭔가 암호 같다. 자신들만의 상류 언어 같다. 세계 지도 꿰뚫는 듯한 착시효과를 준다. 전략가다운 이미지가 박힌다. 그렇다. 쉽게 말해 고급져 보인다.


"뭐해?" 지명 외우기! 어디를 써 먹을까?


"오후에 삼성동 좀 들어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지금 강남 부진한 거 아시죠? 직접 솔루션하겠습니다."

"그래. 실적이 별로 안 좋아. 삼성동 이것들 일을 어떻게 하고 있는 거야! 가서 잘 좀 챙겨 줘!"


강남 지사에서 벌이는 사업 실적이 영 안 좋다. 나아질 기미가 안 보인다. 본사에서 대안을 마련한다. 그래서 가서 같이 협업하려 한다. 이런 일련의 상황을 저렇게 한 방에 끝내는 것이다.


지명을 넣어 말하면, 무조건 있어 보인다.

"이상하지 않나요? 금리가 다운 됐는데 지금 여의도가 너무 잠잠하네요."

"판교가 저렇게 나온다? 곧 샌프란시스코도 덩달아 뛰쳐나오겠군. 지금 실리콘밸리 파트너 수배합시다."

"상해가 지켜보면, 베를린은 숨 쉴 틈도 없겠군요?"

바로 지명은 함축적으로 써 주는 것이다.




잘해봅시다. 낙동강이 춤을 추기 시작했어요! [우정출연 라이테]


낙동강 개발 수주 전을 준비하는 초맹건설. 돈이 보인다. 자그마치 한번 따면 10년 먹거리다.

"그린벨트 해제라.. 낙동강도 춤을 추기 시작했군요. 무엇보다 수주전에 총력을 다해야 될 거예요."

"이번 수주전에 낙동강 거성도 참여한다고 합니다."

"뭐? 낙동강 거성이라면.. 낙동의 별 라이테 산업?? 향토색이 너무 강해서 우리가 밀릴 것 같은데.."


고전무가 정면 승부를 하자고 한다.

"초맹 꿈마을 시티 낙동 리버뷰 센트럴 그랑데 파크 애비뉴로 밀어붙이면, 그깟 라이테 엔젤 블레스 타운쯤이야 충분히 잡을 수 있습니다. 이 참에 한판 붙어서 라이테 산업의 숨통을 끊어버리는 게 어떻겠습니까?"


여러 의견에 고민하던 제니 부사장. 이에 반대한다.

"음.. 다른 곳이라면 몰라도 낙동강에선 라이테 산업을 이길 수 없어요. 그 일대 지역민들 다 라이테 편이죠. 아무래도 우리가 현장 틀어야 될 거 같군요. 아쉽지만 낙동강은 라이테 산업 먹으라고 하죠. 단, 라이테가 돈 많이 쓰게 수주전은 입찰가 팍팍 올려놓고 빠집시다. 우린 한강 벨트에 주력합니다."




철산왕 쟤는 계속 뛰라고 냅 둬! [특별출연 철봉조사러너]


대세가 된 ESG. 사회복지에 뭐부터 어떻게 적용해야 할지, 초맹복지재단의 논의가 활발하다.

"ESG는 아직 직접 나서서 할 필요 없어요. 철산이 나섰으니 우린 일단 좀 지켜보죠."

"네? 철산이요? ESG는 용산이 가장 앞서가고 있지 않나요? 철산이라면.."


현자가 전략을 풀어낸다.

"맞아요. 철산왕. 철산의 복지는 다 그에게서 나옵니다. 그 자가 너무 사기 스탯을 찍어대는 바람에, 지금껏 우리 초맹재단이 못하는 것처럼 보였죠. 철산왕. 그가 ESG에 꽂혀서 다시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근데 저렇게 미쳐 달리면 곧 쓰러질 거예요. 그가 쓰러질 때 철산의 원성이 나올 겁니다. 그 틈에 우리가 기부 물량을 한 번에 풀어버리는 게 효과적이죠."




이제 상암을 뒤집을 시간이다. 펜을 가져오너라! [거액출연 마음의 온도]


요즘 시청률 나락에 빠져 있는 초맹엔터. 한방을 뒤집을 막강한 드라마가 필요하다.


"문제는 스토리와 대본이에요! 인생 역전 스토리 같은 건 이제 더 이상 방송가에 통하지 않아요!"

"전반적으로 지상파도 시청자가 줄어들었어요. 다행인 건 저희뿐만 아니라, 상암 모두 죽 쑤는 상태입니다."

"너도나도 앞다퉈 우수한 PD와 제작진 영입에 사활을 걸고 있습니다. 저희도 어서.."


"아닙니다. 우리는 스토리로 승부를 보겠습니다. 여러분. 불륜의 귀재 정마온 작가라고 들어봤나요?"

"미친 막장 스토리로 지난 10년 간 전국을 호령했던.."

"어느 날 방송가에서 갑자기 자취를 감췄다고 들었습니다. 아무도 행방을 모른다던데.."


"다들 놀라지 마세요. 이미 정마온 선생님께 예를 갖춰 정중하게 영입 제의를 보냈습니다. 곧 차기작을 들고 오실 겁니다. 시청률 귀신 정마온의 등장만으로도, 상암이 모두 긴장하게 될 겁니다. 우리는 정마온으로 뒤집기에 들어갑니다."




바이오메카 송도가 우리를 지켜보고 있어요! [특별출연 수풀림]


만능 질병 치료제를 개발한 초맹바이오사이언스. 홍보만 제대로 하면 일확천금이 이루어지는 상황. 극적인 마케팅과 타이밍이 절실하다. 그땐 글로벌 바이오 마케티스트 수풀림 정도는 투입해 줘야 드라마틱한 홍보가 가능하다. 주가도 떡상한다.


"초맹바이오사이언스의 만능 신약! 우리가 치료한 건 질병입니다. 우리가 극복한 건 공포입니다. 이제 인류의 공포는 굿바이! 바이오메카 송도가 우리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곧 초인류 마케팅이 펼쳐질 겁니다."

"질문 있습니다. 마케팅은 언제 어떻게 진행되나요?"

"모든 준비는 끝났습니다. 곧 세계 보건의 날이에요. 마케팅은 타이밍입니다. 모든 건 엠바고에 부치고 있어요. 조만간 암스테르담이 요동칠 겁니다."


곧 장내가 술렁인다.

"저 사람 누구야? 말하는 거 보면 유명인사 같은데?"

"마켓 승부사 수풀림이야. 세계적인 바이오 마케팅 원탑이래. 이번 신약 홍보 건으로 특별 기용했다던데?"

"너네 아직도 몰라? 업계의 유명한 말이 있지. 마케팅이란 없다. 수풀림이냐 아니냐만 있을 뿐!"


"마케터라 그런가? 너무 약 파는 거 같지 않아?"

"우리 지금 약 파는거 맞잖아! 바이오 신약."

"아! 맞다! 그러네??"




여의도 가는 길은 걱정 마십시오! 이번 판결 서초동만 믿습니다.


지명은 쓰기 따라 단숨에 이미지가 바뀐다. 은밀해 보인다. 표현이 다르다. 우리만의 암호다. 상류 언어 세계다. 본능적 심리를 자극한다. 효과는 아주 탁월하다.


성북동이요? 샌프란시스코요? 반문하는 순간, 물어본 사람이 바보가 된다. 서로서로 눈치 보며 무슨 뜻일까 추측할 뿐이다. 그래서 반격기에도 당하지 않는다. 그때 기세를 이어가 생각할 틈을 주지 않고, 끝장을 내버리는 오피스 게임 고급 스킬 되겠다. 업종이나 분야를 가리지 않고 써먹을 수 있다. 매우 유용하다.


뭐? 다 말장난 아니냐구? 너가 그러니까 안 되는 거야! 몰랐어? 이 게임은 원래 절반 이상이 말장난이야.


교과서가 제대로 알려주지 않을 뿐. 그 말장난하는 사람들이 밥그릇 지키려고 알려주지 않을 뿐이다.


꼼수라 생각할 거 없다. 다들 그런다.

하여 오피서들아. 지도 펼쳐라. 지명부터 외워두자.

아주 요긴할 것이다.


P.S. 어디든 써먹을 수 있겠지? 얼마나 있어 보이냐?


투고하자! 광화문이 브런치를 주목하고 있다! [카메오 류귀복]


다양한 상황을 묘사하고자 강제 출연해 주신, 라이테, 마음의 온도, 수풀림, 철봉조사러너, 류귀복 작가님께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 청계천 전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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