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닝포인트. 언제 올지 모르는 한 순간의 모먼트

Part 2. 그때 그게 너였어? 누군가는 잊지만 누군가는 기억한다.

by 초맹


누군가에게 의미가 되어 주겠다는 건가?


전편 : 회사가 군필자를 우대하는 진짜 이유


소비자가 외면해도 꾸준히 돈이 들어오는 사업. 자리 잡으면 나라님도 함부로 내치지 못하는 사업. 전 세계가 수요를 가지는 사업.


바로 국방사업이다. 인류의 땅따먹기 역사가 세계 평화의 역사로 바뀌더라도 꾸준한 투자가 이루어진다. 이유는 간단하다. 서로가 서로를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부사장님. 읍내에서 잠시 쉬어갈까요? 오늘 사령부 미팅 내용도 좀 정리할 겸요."

계속해서 준비해 온 방위사업. 수주받은 신무기 오더의 연구개발을 위해 전방 부대의 니즈를 경청하고 돌아오는 길에 들른 한적한 시골 읍내.


군부대들은 대부분 산속이나 외지에 있어 교통이 좋지 않다. 보통 군사지역은 작은 읍내에 조그마한 상권이 있고, 그곳에는 일상으로 돌아가는 시외버스 터미널이 자리 잡고 있다.


군부대 인근 상권은 군인들이 주고객이다.


자리를 잡고 앉아 현자는 천천히 카페를 둘러본다.

"이 카페 오랜만이네요. 군수 사업 디렉팅 하던 때였을 겁니다. 무기 공급 계약은 철저히 정부 주도하에 이루어집니다. 기업 단독으로는 불가능하죠. 당시에는 군 내수 공급은 좀 했지만 수출이 어려웠습니다. 당국이 기술 독점을 이유로 반대했거든요. 지금 정부는 외화벌이와 수출을 원하고 있고, 우리는 계속 기술 개발을 해 왔습니다. 물자 쪽은 장성 출신 이상무님이 계속 영업 중입니다. 다음 국제 밀리터리 전시회 때까지 군 니즈 수용이 얼마나 되느냐가 핵심이 될 겁니다."


주문한 커피가 나온다. 주위에는 삼삼오오 군인들이 앉아 이야기 꽃을 피우고 있다. 제니는 커피 위에 새겨진 꽃잎 장식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저도 여기 오랜만에 와요. 군생활을 이 근방에서 했거든요. 이곳은 여전하군요. 외출 나오면 장병들과 같이 쉬어가곤 했었죠."

"근무지가 여기였어요? 이 동네 잘 아시겠네요? 요즘 사내에 부사장님 군대 갔다 온 여자라며 화제입니다. 근데.. 어떤 연유로 군대에 갔는지 물어봐도 될까요?"


제니는 스푼으로 커피 위 꽃잎 거품을 휘휘 젓는다.

"그때는 사회에 나가 뭘 해야 하는지를 잘 모르겠더군요. 아무 이유 없이 이 회사에 들어와 일하고 싶지도 않았고요. 나름의 도피처가 필요했다고나 할까요?"

"음. 그러기에는 너무 오지에서 생활하신 거 아닌가요? 수도권의 환경 좋은 부대도 많지 않습니까?"


순간 현자를 슬쩍 째려보는 제니.

"현실장님. 지금 저더러 왜 빽 안 썼냐는 건가요?"

"하하.. 굳이 얘기하자면.. 그런 질문이 맞겠네요. 단순히 도피처가 필요했다면요?"


"저는 전투병과예요. 일부러 지원했어요. 도피처가 필요했어도 뭐든 제대로 해보고 싶었습니다. 남들 다하는 군생활.. 남자들은 이렇게 말하죠?"

"아무리 장교여도 여러 가지 어려움이 많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려움이요? 어려움이라.. 뭐가 어려웠을까? 떠올려 보면, 저는 매 순간이 어려웠어요."


대답은 의외였다. 아무것도 어렵지 않아 보였던 철녀 제니도 군생활만큼은 어려웠던 것일까? 아니면 남자들 가득한 오지에서 여자로서의 생활이 어려웠을까? 무엇이 그녀를 그토록 어렵게 만들었던 것이었을까?


밥 가져와! 지금 산 위에서 내 부하들이 굶고 있단 말이다!


옅은 미소를 띤 제니는 커피 한 모금을 입가에 적신다. 고개를 들자 군인들이 모여 앉은 건너편 테이블이 보인다. 어느 겨울 훈련 당시가 떠오른다.


전투식량은 늘 부족했다. 고지를 점령하고도 식사 차량은 고지 위로 보급을 하지 않았다. 차량이 올라가기 어렵다는 이유였다. 부대원들이 계속 굶고 있었다. 산을 내려가 보급대와 싸웠다. 그날 고지 위의 바람은 매서웠다. 부하들은 추위와 싸우며 배고픔에 조그만 건빵을 나눠먹고 있었다. 지휘관으로서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날 그렇게 무능함을 경험해야 했다.


반면 옆 고지 미군들의 전투식량은 풍족했다. 심지어 입맛대로 골라먹고 있었다. 후식에 간식까지도 그들은 철저했다. 부러웠다. 그게 뭐라고..


보급대와의 식사추진은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결국 미군 캡틴에게 찾아가 남은 전투식량 지원을 요청했다. 아니 구걸했다. 그들은 비축해 둔 식량을 기꺼이 내주었다. 충분하지는 않았지만 간신히 부하들의 끼니를 해결할 수 있었다.


Captain. Thanks for your service.


많은 생각이 들었다. 군에서 줄곧 배운 거라곤 차별과 더러움의 연속이었다. 군에서 남자와 여자는 달랐다.


'악으로 깡으로!'

'안 되면 되게 하라!'

어떻게? 그저 낡은 사고방식으로 애국심과 정신력만을 강요했다. 고위 지휘관들은 기초적인 훈련과 경계 같은 군의 기본을 망각한 채, 윗분들의 입맛에 맞는 부대 꾸미기, 군가경연대회에 집중했다.


강제와 억압의 보여주기식 한국군. 기본에 충실한 자율성의 미군. 그 차이는 엄청났다. 다치면 남의 자식인 우리 군과 달리, 미군은 다쳐도 끝까지 내 새끼였다. 그들은 보호받고 있다는 느낌이 확실해 보였다.


군에서 훈련 중 사고로 다친 부하가 있었다. 그는 젊은 날 불구가 되어 인생이 끝났다며 울부짖었다. 군은 그를 책임지지 않았다. 부를 때는 나라의 아들, 사고 나면 엄마의 아들이었다. 여기저기 동분서주하며 상급부대에 하소연하고 병원도 알아봤지만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여전히 잊혀지지 않는 기억이다. 지휘관으로서 무력함을 또 한 번 실감할 수밖에 없었으니까.


군에서의 경험들은 많은 생각을 계속해서 엮어가게 했다. 어쩌면 회사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더 많겠구나 싶었다. 군대와 기업을 빗대보면 크게 다르지 않을 테니까?


틈틈히 부하들과 들렀던 그날의 기억. 어라?


"언젠가 이 카페였어요. 나와서 볼일 보고 용사들과 함께 들렀어요. 한참 수다를 떨었을까요? 누가 대신 저희 테이블 계산을 다 해 버렸더라고요. 쫓아나갔지만 놓쳤죠. 멍하니 서서 그때 마음을 정했던 것 같아요. 우리 군은 늘 사기저하인데, 그래도 우리가 누군가에게 의미가 되어주고 있다는 걸까? 그리고 이 순간이 어쩌면 나에게도 의미가 되어주는 걸까? 싶었네요."


"음.. 저도 예전에 군인들 결제해 준 적이 있던 것 같습니다. 그냥 마음 가서요. 힘들게 고생하잖아요. 하하. 오늘 또 이렇게 어려운 비하인드 스토리를 다 듣네요."

"아. 이런. 제가 너무 감상에 젖었나요? 오늘은 이쯤만 해두죠. 늦겠어요. 우리 돈 벌러 가야죠? 이만 돌아가요."


자리를 정리하고 카운터에 선 제니는 문득 뒤를 돌아본다. 여전히 많은 군인들이 앉아 담소를 나누고 있다.

"사장님. 조각 케이크랑 모카빵 여기 인원수대로 추가해 주세요. 아! 디저트도 테이블마다 포장해서 다 결제해 주세요."

"부사장님. 굳이 뭐하러.."

“흐음? 저도 멋있는 거 한번 해 보게요. 어느 누군가에게는 의미가 되지는 않을까요?”


“군인은 잘 먹어야 돼.” 여기 싹 다 미리 결제요!


카페 사장님은 테이블에 다 들리게 곧 추가 주문이 나갈 거라고 외친다. 앉아있던 군인들. 당황하다가 이내, 누군가는 눈빛으로 인사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서서 경례를 붙이기도 한다. 아들 면회로 보이는 한 모자는 직접 와서 감사하다며 인사를 건넨다.

"아닙니다. 마땅히 대우받으셔야 하는 분들이십니다. 그럼."


소소한 이벤트를 마친 제니와 현자는 밖으로 나와 돌아갈 채비를 갖춘다.

"차 키 주세요. 오늘 재미없는 얘기 들어주느라 힘들었을 텐데 가는 길은 제가 운전할게요."

"그럼 사양 않겠습니다. 도착하면 시간 늦을 거 같군요. 그래서 말인데, 저.. 회사 말고 집 근처에 좀 내려다 주고 가시면 안 될까요? 하하."

"하아.. 제가 부사장으로 보이긴 하는 거 맞아요? 이게 택시예요? 하여간 진짜!! 안전벨트 하세요. 선탑 확인. 출발합니다."


돌아오는 길. 창문을 살짝 내려본다. 피부에 닿는 바람이 상쾌하다. 사이드 미러에 보이는 읍내가 점점 작아져 간다. 다시 오피서의 현실로 돌아가고 있다.

"우리가 하는 일들이.. 누군가에게는 의미가 되어줄 수 있는 거겠죠?"

"…………………"


시골 길의 드라이빙. 바람이 상쾌하다.


옆자리의 현자는 이미 잠들어 있다. 세상 편안해 보인다. 죽은 거 아니지?

그래. 넌 자라. 자는 거 보니 내가 운전 좀 하나 보구나. 이럴 줄 알았으면 뒷자리 타서 편히 자라고 할 걸 그랬나? 아니지. 그러면 너무 택시 같으려나?


피식. 제니의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옆자리에 곤히 잠든 현자를 잠시 바라본다.


어느 같은 시간. 같은 장소. 엇갈린 그들. 너였구나?


'그때 그 카페 결제.. 누군지 나 알고 있어요. 고마워요! 의미가 되어줘서.'


순간이 의미가 된다.

의미는 많은 것을 바꾼다.


아무것도 아닌 하나의 말과 행동이 누군가에게는 삶을 바꾸는 커다란 의미가 되어가고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P.S. 회사생활에 의미가 필요할 때 읽기 좋은 책


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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