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초맹 Dec 05. 2024

회사에서 품의서는 누가 쓰는 게 맞을까?

엎치락뒤치락 거리는 품의서의 임팩트


공적이 오락가락하는 품의서


누구나 한번쯤 써 보는 품의서. 품의를 올린다는 것은, 어떤 일을 진행하려고 내용을 정리해 상부에 승인을 공식적으로 요청하는 것이다. 기안이라고도 한다. 일단 돈 드는 건 다 품의를 쓴다. 회사는 돈 들어가면 예민해지니까.


물론 간단한 품의도 있지만, 사안에 따라 돈과 시간이 많이 드는 일도 있다. 그게 많이 들면 점점 난이도가 올라간다. "이런 거 한번 해 보면 어때요? 헤헤" 할 수준의 기획안 정도가 아니다.


주변 여건을 미리 다 조성해 놓아야 한다. 이 준비가 되기 전에 쓰면 안 된다. 이때의 품의란 사실상 준비를 끝내놓고 마지막 확인 사살을 하기 위한 작업이다. 그래서 이 단계는 통상 시간이 오래 걸린다.


요거 확인해서 품의 좀 올려 줘!


품의 하나 올리기 위해 주변 사람들을 설득하고 다닌다. 상사들에게 몇 번씩 설명과 보고를 하는 경우도 빈번하다. 특히 일의 규모가 커지고 연관된 부서와 사람들이 많아지면, 품의서를 올리는 사람은 여기저기 불려 다니게 된다.


대략 이런 공식이 성립하게 된다.

초맹의 기안 난이도 공식
품의서 결재 난이도 = 연관된 사람수 X (비용 + 시간 + 효과) X 결재권자의 관심


설명에 설명을 더 해도 빠꾸에 또 빠꾸를 계속 맥인다. 자존감이 나락 가고 중간에서 죽어난다. 포기하고 나 안 할래 묵혀두고 있으면 또 왜 안 하냐고 노빠꾸를 맥인다. 그래서 다시 하면 또 빠꾸 반복이다. 허락해 줄 듯 말 듯하면서 또 빠꾸.. 어쩔 땐 일부러 맥이는 거 같다.


관계자들을 모아두고 설명하며 협조를 구한다.


"기획이랑 다 좋은데 비용을 좀 낮추면 좋겠는데.."

"비용은 괜찮은데, 효과가 있을지가 의문이야."

"기획도 좋고, 비용도 오케이! 효과도 확실해 보이는데,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네?"


빠꾸의 이유는 매우 다양하다. 어제는 알겠다고 하며, 품의를 올리면 또 윗분이 기억 못 하고 "내가 언제?"를 시전 하기도 한다. 그렇게 한 두 달 끌고 다시 올리면 어떻게 되느냐? 난생처음 보는 일이라는 반응이 나온다.


보스의 설득 수치를 75까지 올렸다. 이제 25만 더 올리면 퀘스트 클리어다. 근데 설득 사냥을 멈추는 순간, 올려둔 보스 설득 지수는 하루에 10씩 줄어든다. 그래서 큰 일을 품의할 때는 묵혀두거나 시간을 오래 끌게 되면 난이도가 더 올라가는 것이다. 규모가 큰 일일수록 길드원 모두 동원하여 단시간에 노빠꾸 정신으로 밀어붙여야 한다.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주변 사람들이나 결재권을 가진 윗분들은, 기안 올린 사람이 그 일을 하는 사람이라고 인식하게 된다. 그렇다. 품의란 ‘이건 내 실적이야!’를 찜하는 효과가 있다. 품의 통과하고 나면 다른 사람들 시키고 적당히 놀아도 위에서는 품의 쓴 사람이 다 했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각인되어 있다. 게임 끝났다.


여기저기 찾아다니며 설득을 해 댄다.


이런 품의 효과를 교묘히 역으로 이용하기도 한다. 다음 문제를 하나 풀어보자.

회의 중 나온 표현이다. 상대방이 품의를 올려달라고 하는 이유에 가장 가까운 것은?
"이 건은 그쪽에서 품의 올려주세요."
(1) 망하면 너네 탓이다.  
(2) 내가 어떻게 올리는지를 몰라.  
(3) 일은 우리가 다 해 줄게.
(4) 우리는 품의 올리는 부서가 아냐.

[정답] 망하면 너네 탓이다.
[응용] "품의는 저희가 올릴께요!" = 이건 내 실적이다.

저 좋은 품의를 굳이 양보하는 이유는?

그렇다. 망할 것 같아 대신 죽어줘야겠다고 떠미는 것이다. 어렵게 기안 하나 올려서 통과시켰다고 그 일이 잘 된다는 보장이 없다. 그렇다면 품의서에 쓴 일이 실패했을 때도 그 책임은 기안자에게 간다.


그런 이유로 이 품의라는 것은 양날의 칼과도 같다. 품의를 올린 일이 성과가 나면 품의를 올린 사람의 실적이 되어 버린다. 실제 일을 누가 했냐는 별 상관없다. 위에서 볼 때는 아래서 누가 무슨 일을 했냐가 중요하지 않다. 그 일이 성과가 났냐 안 났냐가 관심사다.


품의를 올리는 것은 보통 그 일을 하자고 한 사람, 그 일을 할 사람이 올린다. 즉, 이건 내꺼다 찜! 하고 침 발라 놓는 거다. 그러나 현실은 복잡하다. 여러 명이 같이 할 일, 다른 부서와 같이 하는 일이 더 많다. 일의 규모가 크면 커질수록 쓰는 돈이 많아질수록, 심리적 부담감이 많이 작용하게 된다. 만약 품의를 받는 일이 오너의 관심을 많이 받는 일이라면 상당한 부담 버프가 추가로 발생한다. 부담 버프는 팀장 100%, 임원 200%, 사장 400%로 올라간다고 보면 된다.


"이거 품의 좀 써 달라니까!" vs "싫어! 싫다구!"


여기서 잘 봐야 한다. 선호하는 품의와 피해야 할 품의가 나눠지기도 한다.


1. 선호하는 품의 : 쉽거나 일하는 티 잘 나면서 성과 확실해 보이는 일이다. 겟하고 들어가라!

- 일은 다른 사람들이 다 하고 숟가락 얹으면 되는 일

- 윗선의 관심도가 높고 성과날 가능성이 커 보이는 일

- 대부분 혼자 하면서 일하는 티 팍팍 낼 수 있는 일

- 이미 잘 개척해 놔서 고하면 아이템 먹을 수 있는 일

- 다른 건과 엮인 게 많아, 잘하면 남 실적도 다 꿀꺽하는 일


2. 회피하는 품의 : 어렵고 돈이 많이 들면서 망할 각이 보이는 일이다. 떠밀어라!

- 내용은 좋은데 다른 부서가 비협조적으로 나오는 일

- 일 벌려봐야 실패 각이 훤히 보이는 일

- 비용과 시간이 많이 필요한데 가성비 떨어지는 일

- 어쩔 수 없이 떨어졌는데 암만 봐도 공치사 거리인 일

- 사장 임기 얼마 안 남았을 때 시키는 수명연장용 프로젝트


"내가 기안 쓸께!" 서로 차지해서 쓰려는 품의가 있다.


품의를 너에게 올려달라는 말을 하게 되는 이유는 상대에게 떠밀고 싶은 거다. 그닥 협조하고 싶지 않거나 일이 잘 안 될 것 같아 피하기 위해서다.


반대로 우리 팀에서 같이 하자고 제안했는데, 품의를 다른 부서에서 올리겠다고 하는 경우도 있다. 뭔가 숟가락 얹을 각이나 실적 각이 보여서 자기들이 단물만 쏘옥 가로채겠다는 얘기다.


일이 하다가 잘 안 될 수도 있는데, 결재한 분들이 책임져야 하지 않냐구? 뭐 이론은 그러하다. 현실은 다 꼬리 자르기로 빠져나가고 아래로 전가해 버린다. 멋모르고 기안 한번 잘못 올렸다가 옴팡 뒤집어쓰고 나락 가는 거다. 이 게임에서 절대 임원은 믿는 게 아니다.


여기저기 다 설득했지만 결국 깨지고 품의는 반려된다.


낭떠러지에는 안 가는 게 가장 좋지만, 가서 떠밀리게 되면 낙하산은 있는지 보고 뛰어내려야 하는 것이다. 그게 없다면 떠민 애를 꼭 껴안고 같이 뛰어내리면 된다. 아마도 상대는 같이 뛰어내리고 싶지 않을 거다.


누가 품의 쓸지 서로 떠민다면, 그냥 공평하게 가위바위보 해서 정해라. 지는 사람 선택권 박탈하기. 그러다 지면 다 뒤집어쓰는 거 아니냐고? 괜찮다. 그럴 땐 일을 반으로 나눠서 각자 품의 써라. 아니면 품의를 쓰고 보고권을 가져오면 그들의 수작질을 뒤집을 수 있다. 그래도 처음부터 세팅을 잘해놓는 게 가장 편하다.


고로 품의나 기안은 어버버 하다가 떠밀려서 쓰는 게 아니다. 이 일이 똥인지 된장인지 각을 잘 재고 쓰는 것이다! 그게 오피스 게임 품의서의 원리다.


P.S. (주)조선의 6시간 만에 망한 그 비상계엄 이벤트 품의는 누가 쓴 거지? 역대급 울트라 크레이지 어토믹 하드 난이도의 품의 같던데.. 품의서 쓰고 하기는 한 건지.. 아님 서로 폭탄 돌리기 하다 기안 안 올리고 그냥 다 자폭한 거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