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을 대하는 태도
내 생일 아침. 아무도 모르는 눈치였다. 아니, 잊은 것 같았다. 남편도 아이들도 생일 축하한다는 말을 건네지 않았다. 기념일이나 이벤트 같은 것에 개의치 않는 나였지만, 가장 가까운 가족이 아는 체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참 별로였다. 아니, 오히려 더 큰 축하를 바라게 했다. ‘어쩜 저래. 어쩜 모를 수가 있어.’
생각을 곱씹을수록 서운함이 짜증이 되고, 화로 변했다. 넷이 외출을 해서도 머릿속엔 온통 생일, 생일, 생일. 곱씹는 만큼 억울해지기까지 했다. ‘내가 어떻게 했는데...’
눈치를 주었다. 오늘이 무슨 날인지 직접적으로 꺼내지 않으면서, 알 수밖에 없도록. 그제야 알아챈 가족들은 너무 당황하고 미안해서 어쩔 줄 몰라하는 모습이었지만, 내 맘에 썩 들지 않는 반응에 나의 서운함은 가시지 않았다. 대놓고 아이와 남편의 마음을 어렵게 했다. 눈치를 주는 만큼 불편하면 좋겠다는 고약한 심정으로.
서운함의 크기는 뒷골이 아플 정도였고, 난 머리의 통증을 고스란히 느끼며 꿈에서 깼다.
3자에서 본 나의 모습이 참 안타까웠다. 생일 내내, 꿈 내내, 서운함만 키웠던 나를, 아니 그것이 억울함과 화로 부풀도록 곱씹기만 했던 나를 보며 인간의 옹졸함이 얼마나 나와 주변을 괴롭힐 수 있는지 보게 되었다.
서운함은 언제나 예상치 못한 순간에 찾아온다. 기대하지 않았다고 생각한 순간에도, 마음 한구석에서 자라고 있었던 작은 바람이 무너지는 순간, 그것은 얼굴을 드러낸다.
아무렇지 않게 넘길 수도 있었을 일들이 때로는 마음을 크게 흔든다. ‘나는 괜찮아’라고 되뇌어보지만, 그 말이 내면의 진실이 되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하다. 서운함은 그 짧은 찰나에, 사람을 불편하게 하고, 관계를 어색하게 만들며, 스스로에게도 상처를 남긴다.
서운함을 표현하는 방식도 제각각이다. 어떤 때는 서운한 마음을 꾹꾹 눌러 담는다. 괜찮다고 애써 넘기지만, 쌓이고 쌓이다가 엉뚱한 순간에 터져버린다. 별것 아닌 일에 갑자기 화가 나고, 눈물이 나고, 과거의 서운함들까지 한꺼번에 밀려와 감정을 감당하지 못한다.
또 어느 날엔 서운함을 곧바로 드러낸다. 꿈처럼. 상대가 모른 채 넘어가는 것이 억울해서, 일부러라도 알아차리게 만든다. 때로는 애매한 눈치로, 때로는 직설적인 한마디로. 하지만 그렇게 해서 해결되는 감정이 얼마나 될까? 상대의 미안함이 내 서운함을 말끔히 씻어주지는 않는다. 오히려 더 무겁고 난처한 공기가 흐를 뿐이다.
서운함을 통해 우리가 얻는 것은 무엇일까? 위로받지 못한 감정이 남기는 허탈함, 스스로를 더 초라하게 만드는 생각, 관계를 소원하게 하는 벽. 결국, 서운함은 우리가 받아야 할 것이 아니라 스스로 놓아주어야 할 감정인지도 모른다.
나의 생일을 잊은 가족에게 품었던 감정도 그렇다. 그날 하루를 온전히 서운함으로 채운 것은 결국 나 자신이었다. 축하받지 못했다는 억울함보다, 스스로를 그 감정 속에 가두고 있던 내가 더 안타까웠다. ‘이런 날도 있지.’라고 한마디 했다면, 그 하루는 더 가벼웠을까. 생일을 잊었던 상황이 꿈이어서 다행이었던 게 아니라, 나를 좀 더 솔직하게 바라볼 수 있게 해 준 꿈이라 고마웠다.
서운함의 대가는 생각보다 크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움켜쥘 수도, 흘려보낼 수도 있다. 결국 선택은 나의 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