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를 거쳐 피어나는 것들
식물의 상태는 늘 예측할 수 없고 어느 집에서나 식물은 피고 진다. 어떻게 식물을 잘 기를 수 있어요? 하고 물으면 많은 그린 핑거스들은 일단 많이 죽여봐야 해요, 라는 냉철하지만 어쩐지 섬뜩한 답을 내놓는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거기에 식물 대신 무엇을 넣어도 우리가 납득할 만한 문장이 된다. 어떻게 글을 잘 쓸 수 있어요? 일단 많이 망쳐봐야 해요. 어떻게 인간관계를 잘할 수 있어요? 일단 싸우고 안 보기도 해봐야 해요. 그렇게 실패를 독려하는 문장들. 나 역시 실패야말로 이후의 갱신을 위해 어쩔 수 없이 거쳐나가야 하는 과정이라고 여기지만 그것을 받아들이기란 너무나 어렵다고 생각한다.
김금희 에세이 <식물적 낙관> 중 '나의 부겐빌레아' p. 165
“어떻게 식물을 잘 기를 수 있어요?”
“일단 많이 죽여봐야 해요.”
《식물적 낙관》 속 문장을 읽고 나는 잠시 멍해졌다.
식물 하나 제대로 못 키우는 스스로가 떠오르기도 했지만,
곧이어 이 문장은 식물 너머의 것들을 건드렸다.
글쓰기, 인간관계, 그리고 삶 전체.
어쩌면 실패하지 않고는 제대로 애정할 수도,
깊이 알 수도 없는 것들이 있다는 사실.
우리는 종종 실패하지 않기 위해,
망치지 않기 위해
기꺼이 외면하거나 거리를 둔다.
하지만 김금희 작가가 전하는 이 솔직한 한마디는
정면을 바라보게 만든다.
“일단 많이 죽여봐야 해요.”
섬뜩하지만 진실한 말.
그리고 왠지 모르게 위로가 되는 말.
그러니까 실패는 예외가 아니라
통과해야 할 입구라는 사실.
나는 글을 쓴다.
하지만 여전히 글을 ‘잘 쓰는 법’을 모른다.
무수히 썼고, 무수히 지웠고,
잘 쓴 줄 알았던 문장이 민망해진 순간도,
끝내 도망치고 싶은 글 앞에 오래 앉아 있었던 날도 있었다.
그 많은 실패 끝에 남겨진 건
글솜씨가 아니라 겨우 나 하나였다.
나라는 사람을 조금 더 낯설게,
그러면서도 애정 어린 눈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된 것.
그게 글이 내게 준 유일하고 확실한 선물이다.
아이를 키우는 일도 비슷하다.
정성을 쏟는다고 다 되는 게 아니라는 거.
내가 잘해도 무너지고,
잘못해도 씩씩하게 자란다.
육아에는 정답이 없다는 말은,
어쩌면 실패를 필연적으로 받아들이라는 뜻일지도 모른다.
사랑하고 애쓰면서도
우리는 계속해서 실수하고,
그 실수들 위에 관계가 자란다.
싸우고, 외면하고, 후회하면서
조금 더 단단하고 깊은 사이가 되어간다.
실패는 우리가 뭔가를 진심으로 해봤다는 증거다.
그 실패가 없었다면
우리는 여전히 손끝으로만 사랑하고,
머리로만 관계를 맺고,
형식으로만 삶을 꾸렸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실패는
결국 ‘기꺼이 엉망이 되어본 사람’에게만 오는
특권 같은 것 아닐까.
그만큼 시도했고, 그만큼 애썼다는 뜻이니까.
지금 나는 조금 덜 두렵다.
실패가 나를 평가하는 도구가 아니라,
조금 더 살아보게 하는 통로라는 걸
조금씩 알아가고 있기 때문에.
식물은 피고 진다.
햇볕이 지나치면 타고,
물기가 많으면 썩는다.
하지만 죽은 자리에서 다시 싹이 트고,
완전히 말라버린 줄 알았던 화분에서
작은 잎이 솟아나는 걸 우리는 본다.
글도, 관계도, 인생도 그와 다르지 않다.
망쳐본 사람만이 제대로 돌보는 법을 안다.
그러니 실패는,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살아 있다는 증거이자
다시 피어날 수 있다는
조용한 희망의 징후다.
서나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