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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 Jan 15. 2023

당신이 투명한 사랑이었구나

책 <가만히 부르는 이름>을 읽고 


**스포주의


늦은 깨달음은 빨리 눈을 뜨게 한다. 지난밤 나는 울음을 참을 수 없었다. 지난 사랑이 했던 말들이 다시 나에게로 왔다. 감정이 쓰나미처럼 밀려오면 온몸이 으슬으슬 떨리며 몸살이 올 것 같다던 그 아이의 말처럼 어느새 내 몸은 그렇게 되어있었다. 그 아이는 투명한 사람이었구나. 나에게 있는 그대로 표현하고 마음을 아끼지 않았고 정직했다. 나는 그 모습이 어리석어 보였고 영리하지 않아 보였다. 어쩌면 그 반대였을 것이다. 


책을 읽었다. 마치 나를 보는 것 같은 여자 수진과 그 아이와 같은 말을 하던 한솔, 내가 가장 사랑했던 그 사람과 닮은 혁범이었다. 지금도 내가 하는 실수들을 그 여자도 하고 있었다. 질문하지 않는 것, 외로움 속에 자신을 내버려 둔 것. 그리고 그 아이를 버린 것. 


수진은 지금 회사 대표이자 지난 스승과 같은 혁범을 오랜 기간 품어왔다. 그런 혁범을 두고 급작스럽게 런던으로 떠났다. 5년 뒤 다시 돌아왔을 때 혁범을 다시 찾았고 함께 일하고 싶다고 말했다. 혁범은 담담하게 그녀를 받아들였다. 수진은 혁범을 존경했다. 어떤 소리에도 흔들림 없이 자신을 믿고 걸어가는 단단한 사람이었다. 


수진은 혁범을 다시 만나 함께 일하며 사적인 관계로 발전하게 되었다. 매주 주말 그가 수진의 집에서 시간을 보냈다. 자신의 집보다 그녀의 집 아니 그녀의 품이 혁범을 편안하게 했다. 하지만 그는 일요일은 늘 전처의 딸과 함께 시간을 보냈다. 정중하고 세심하게 수진에게 양해를 구하던 혁범이지만, 수진은 혁범을 이해하지만 외로웠고 묻고 싶은 수많은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수진은 회사 1층의 조경을 담당하던 한솔을 만나게 된다. 앞치마를 매고 식물을 다르던 한솔은 올곶고 순수한 청년이었다. 그와의 인연은 수진의 작은 호의로 시작됐다 한솔은 그녀에게 작은 나무 화분을 선물하며 자신의 마음을 보이기 시작했다. 한없이 깨끗하고 맑고 투명한 유리처럼 수진을 향한 마음을 모두 내비쳤다. 수진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모든 단어들이 당신을 사랑해요라고 열렬히 외치고 있었다. 수진은 그런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어 낯설지만 새삼스럽게 좋고 기다려지기도 했다. 


혁범과 전처 정원이 함께 있는 모습을 가만히 볼 수밖에 없던 수진의 마음은 무섭게 요동쳤다. 둘이 어떤 이야기를 하기에 그렇게 속삭이는지, 겨우 내 옆에 온 혁범을 데려가는 정원을 보며 그저 수진은 상사의 전처에게 목인사를 건넬 뿐이었다. 수진은 그날 한솔에게 데리러 와달라고 문자를 보냈다. 한솔은 기다리고 있었던 듯 수진에게 왔다. 한참 함께 걸었고 한솔은 그늘진 수진의 얼굴을 보며 그녀가 다른 이를 사랑하고 있고 상처받았음을 눈치챈 것 같다. 수진은 곧장 한솔에게 오늘 밤 같이 있어줄 수 있냐고 물었다. 그렇게 둘은 하룻밤을 함께 했고 한솔은 수진을 더 깊이 사랑하며 아껴주고 싶었다. 하지만 수진은 어느 때와 다름없이 상처받고 외로운 육신을 타인에게 잠시 맡기며 잊으려 했던 것이었다. 


그 이후 한솔은 수진에게 메일을 보내왔다. 수진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기에 한솔은 다듬고 다듬은 마음을 전했다. 그렇게 몇 통의 메일, 수진은 한솔의 마음을 모를 리 없었고 이전과 다름없이 하룻밤으로 외면하고자 했다. 그 순수한 마음에 대한 죄책감과 위로받고 있는 자신까지. 

한솔은 자신이 상처받을 준비가 되어 있으며 수진이 불편하다면 자제해야 함을 알고 있었다. 그렇게 마음은 억누르지만 우연히라도 그녀를 보고 싶은 마음으로 가득했다. 


시간은 흘러 크리스마스가 다가왔다. 수진은 긴 휴가와 함께 런던을 찾았다. 역시 혁범은 함께하지 않았다. 혁범은 아이와 함께해야 했다. 그리고 런던에 있다는 한솔의 메일. 수진은 런던에서 공부하던 때의 나날을 되새기며 홀로 잔잔하게 보냈다. 그러던 중 홀로 생각에 잠겨있다 해가 지는 것을 늦게 알아챘다. 낯설고 어두운 곳에 홀로 남가진 수진은 미치도록 외롭고 무서웠다. 어디로 가야 할지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갑자기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는 그런 상태. 혁범에게 당장 자신에게 오라고, 뭐가 됐든 와달라고. 돌아온 전화는 한솔이었다. 안도와 실망이 섞인 수진의 얼굴. 한솔은 그다음 날 런던을 떠나는 일정이었다. 수진을 만난 것에 한솔은 한없이 들떠 있었고 다시 못 볼지도 모를 수진의 모든 것을 눈에 담고 싶었다. 돌아가는 일정을 미루고 수진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겨울정원에 가자고 제안했다. 


겨울정원으로 가는 차 안에서 한솔은 조수석 의자를 뒤로 젖혀주고, 수진이 편히 잠들도록 도왔다. 그리고 수없이 옆을 돌아보며 수진이 있는지 확인했다. 한솔은 수진에게 겨울정원의 식물들을 세심하게 이야기해 주었고 수진 역시 흥미롭게 들었다. 


수진과 한솔은 한국으로 돌아와서도 계속 만남을 이어갔다. 식물과 책으로 가득한 한솔의 집. 수진이 있는 한솔의 집. 한솔이 읽고 밑줄로 가득한 책, 수진의 향이 밴 침대 자리. 

한솔은 수진에게 

"그 사람 많이 사랑하나 봐요"
"당신을 외롭게 하는 사람은 만나지 말아요"

"사랑해요. 당신을 아프게 하는 사람이 나였으면 좋겠어요" 

라고 말했다. 한솔은 참으로 먹먹한 사랑이다. 이미 버려질 것을 잘 알고도 자신보다 수진을 더 걱정했다. 


상하이 일로 한참 동안 자리를 비운 혁범이 돌아왔다. 그간 많은 프로젝트를 맡았지만 혁범에겐 이번 일은 크나큰 고비 중 하나였다. 어느 때보다 야위었고 지쳐있었다. 그리고 한창 밝아진 수진을 보았다. 그녀에게 다른 사랑이 찾아왔음을 직감했다. 또 자신이 같은 잘못을 반복하고 있음을 혁범은 깨달았 던 것 같다. 수진에게 오랜만에 밥을 차려주겠다며 장을 봐 찾아갔다. 수많은 질문이 맴돌지만 침묵과 화제를 돌린 뿐이었다. 그렇게 혁범은 수진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밝아 보인다고 묻게 되었다. 수진은 그런 혁범이 야속했다. 그리고 수진에게 한솔의 문자가 왔다. 

"사랑해요 오늘도 엄청 사랑함" 

울컥하는 마음을 수진을 눌렀고, 혁범은 유리잔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그리고 주저앉아 깨진 유리를 줍고 있는 피투성이의 혁범을 말리는 수진. 수진은 한 번도 본적 없는 혁범의 울음을 보았다. 

수진은 다친 혁범을 데리고 혁범의 집으로 향했다. 혁범의 지난 미련이 남아있을 거라 생각했던, 피하고 피하던 혁범의 집에 들어섰을 때의 허무함. 정말 황망한 사막 같은 혁범의 집이었다. 그렇게 도달한 그곳에서 수진은 그간 하지 못한 말들을 쏟아냈다. 


그 이후 수진은 잘 자지 못했다. 한솔에게는 더 이상 편지도 만남도 없을 것이라 말했다.

수진과 한솔은 마지막 밤을 함께 보낸 뒤 완전히 떠내 보내야 했다.


수진은 혁범과 결혼하게 되었다. 39살이 되던 해에는 남자아이를 낳았다. 나이 들어가고 있는 서로를 보며 사랑스러운 아이를 보며 그렇게 살아갔다. 문득 자신의 아들을 볼 때 한솔을 떠올리던 수진이었다. 


가만히 부르는 이름, 제목처럼 수진에겐 그 이름이 한솔이었을까. 약간 저린 마음을 한편에 두고 살까. 수진은 비로소 행복했을까. 이 책을 읽는 동안 마치 수진인 것처럼 마음이 아팠고 함께 울었다. 다시금 내게도 투명한 사람이 왔다갔음을 깨달았다. 그 얼마나 순수하고 정직한 사랑이었는지. 나는 비록 외로움 속으로 돌아왔지만, 지금도 그 아이의 말들은 큰 위로가 되어준다. 한솔이  수진에게 그랬듯 그 아이도 나에게 그러했다. 상처를 알아보는 눈, 상처를 어루만지는 말, 따뜻하게 데워주는 육신까지. 여전히 난 그 아이에게 묻곤 한다. 너는 어떻게 날 사랑한 건지. 


뒤늦게 밀려오는 감정의 쓰나미는 많은 잔해를 남긴다. 나의 어리석음, 나를 향한 그 아이의 모든 행동과 말들이 빠르게 퍼져 온몸이 아플 것 만 같았다. 마치 토해내듯, 참을 수 없어 글을 써 내려간 새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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