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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 Feb 18. 2020

그런 고민

#03 이제야 건네는 잘 가

나는 아직도 꿈에서 그를 본다.

나는 아직도 그를 떠올리면 무슨 이유이든 눈물을 흘린다.

나는 아직도 그를 믿고 있다.

나는 아직도 그를 잊고 있다.

내가 알던 그가 실제 하는 게 맞는지, 나를 사랑했던 게 맞는지

이제는 그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다.


내 모든 감정을 쏟을 정도로 몰두했던 이가 있었다. 그는 뚜렷한 직업관, 가치관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그가 나는 좋았고, 닮고 싶었다. 자신이 하고자 하는 길에 흔들림 없이 꿋꿋하게 걸어갔다. 그런 그에게 짐이 되고 싶지 않았다. 그를 사랑하는 기간 동안 기다림과 외로움 속에서 묻혀있어야 했지만 그에게 말하지 않았고, 뭐든 꾹 참아냈다. 나는 한자리에 머물며 그만을 기다릴 뿐이었다.


그가 나를 찾아올 때마다 늘 이런 말을 했었다.


미안해. 기다려줘서 고마워.


그리고 이 마지막 말을 남기고, 그는 나를 찾지 않았다.


다시 돌아올게.


그리고 또다시 돌아올 것이라는 믿음 하나로 그를 계속해서 기다렸다. 한 3년쯤 접어들었을 때, 이 상황이 정상적이지 않음을 깨달았다. 내가 그를 사랑했던 마음은 마치 눈을 가린 듯, 내 모든 현실 감각을 몰살시켰다. 그 와중에 자신을 참 끈기 있고 굳건한 인간이라고 생각했으니 말이다. 그렇게 그와 나쁜 이별을 하고, 홀로 시간을 보냈다.


26살이 되던 해, 지금의 애인을 만나게 되었다. 편하게 J라고 부르겠다. J는 내게 잘 웃었고 다정했다. 무엇보다 나를 진심으로 사랑했다. 나에 대해 궁금한 것이 참 많은 J지만 눈치는 없었다. 그러나 감성적으로 예민한 탓에 사람이 가진 감정에 대해서는 잘도 알아냈다. 처음 내가 다른 사람을 좋아하면서 자신과 만났던 것과 잊지 못한 인연이 있다는 사실 모두 귀신같이 눈치챘기 때문이다.


그렇다. 나는 참 그 아이에게 나쁜 사람이었다. 마치 날 떠난 그처럼.


J는 종종 그 사람에 관해 물었다. 나는 대부분 J 앞에서 눈물을 보이고 말았다. 그 감정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울고 있었다. 그때마다 J는 나를 안으며 말했다.


괜찮아. 그때 울지 못해서 그래.

울어도 돼. 쏟아내야 그 감정이 말라.


나는 병적으로 눈물을 보이는 것을 싫어했다. 아마도 어릴 때 나도 모르게 배운 행동이지 않을까 싶다. 누군가에게 약해 보이기 싫었고, 늘 강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뜨거운 눈물이 느껴지는 볼의 감각은 내가 그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다시금 깨닫게 하는 따가운 통증이었다. 나는 J로 인해 그 감각을 깨우게 되었다.


때때로 나는 J에게 말했다.


나는 그간 받지 못한 사랑을 너를 통해 받는 것 같아.


또 말하지 못한 말, 하늘이 나를 용서해주는 기분이 든다고.

주책없이 울고 싶지 않아 말하지 못했다. 그런 J는 나에게 말했다.


나는 벌을 받는 것 같아.

이전 연인들에게는 충실하지 못했거든.


J의 말에 나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정말 사랑이란 건 돌고 도는, 결국 반복되는 것이 아닐지. 내 상처가 다음 연인에게, 그리고 그 연인이 다른 연인에게 건네는 것이 사랑이 아닐지.


나는 점차 눈물짓는 날이 많아졌다. 여전히 J는 나를 안아주었고, 질투하기도 하며 곁을 지켰다. J를 만난 지 2년을 넘겼지만 내 마음을 다 주지 못했다. 이 또한 나보다 J가 먼저 깨달았다. 마음을 많이 다쳤던 것 같다. 누군가에게 마음을 주는 것이 무서워졌고, 다가가는 데 많은 시간이 걸렸다. 이 사실은 나의 성질이 되었다.


우리 인간은 완벽할 수 없는 존재다. 특히 사랑하는 이 앞에서는 그렇게 바보일 수가 없다. 아니 J 식 표현으로 한다면 호구가 되어 버린다. 이것을 갖기 위해 온갖 이유와 명분을 찾아 붙이며 굉장히 비싼 비용을 지불하는 호구. 그래. 나는 그에게 호구였다. 그렇게라도 갖고 싶었던 사람이었다. 그에게 떠난 이유를 물으려고도 따지려고도 하지 않았던 이유도 그러했을 것이다.


나는 스스로 이 아픔을 깨지 못했다. 아직 시간이 부족했던 것일 수도 있다. 그렇게 느리고 느린 나에게 다가온 J. 지워지지 않아 숨기고 싶던 흉터를 외면하지 않고 밴드를 붙여주며 괜찮은지 물어주는 J. 그로 인해 곁에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소중하고 아픔을 어떻게 다가가야 할지 배우게 되었다.


앞으로 마주한 시간 역시 소중히 여기기로 했다.


이제는 정말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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