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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애일당 Jun 13. 2021

지금, 인연

156일째, 서른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 말이 고리타분하긴 해도 참말이라 믿는다. 그래서 나의 어린 날을 생각하면 스치는 인연을 하나라도 놓칠세라 마구잡이로 욱여넣다가 주머니가 터지는 날들의 반복이었던 것 같다. 인연을 소중히 여기는 건 좋았지만 어쩌다 흘려도 그대로 놔두는 법은 몰랐다. 평생 갈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던 친구와 한순간에 교류가 끊기고 안부조차 궁금하지 않은 사람이 되기도 하고 한 동리에서 마음만 먹으면 심심풀이 땅콩으로 볼 수 있던 친구를 일 년에 한 번, 그것도 작심해야 겨우 볼 수 있는 거리에 살게 되기도 한다. 인생은 내 생각대로, 마음먹은 대로‘만’ 흘러가지 않더라. 그러다 보니 작년에 스쳐서 엮인 인연을 올해도 여전히 만질 수 있는 거리에서 엮으며 산다는 건 그것대로 귀중한 일인 것 같다.

퇴근길, 전화가 한 통 왔다. 마침 작년 이맘때쯤 그녀와 찍은 사진을 본 참이었다. 스마트 폰에 그녀의 이름을 확인한 순간, 심장이 힘차게 뛰었다. 거울로 확인하지 않았지만 혈색이 돌았을 거다. 그녀는 나에게 그런 마술을 부리는 사람이다. 두 해 전에는 그녀와 회사 옥상 한 귀퉁이에서 돗자리를 깔고 점심을 먹었다. 그다음 해에는 그녀의 태에서 난 아가의 100일을 함께 축하했다. 그리고 오늘, 수화기 너머 옹알이하는 아가 소리가 들린다. 3년째 다정다감한 목소리는 조용한 파도처럼 마음의 모래를 적셔서 색이 진하게 만든다. 소설 속 가상의 인물, 실제했지만 만날 수 없는 위인을 빼면, 그녀는 내가 처음 만난 어른이었다. 스물하고 여덟, 상경해서 진짜 어른을 만났다. 그녀를 통해 아기가 걸음마를 배우듯 세상을 이해하고 그 속에서 편하게 호흡하는 법을 배웠다. 그 교수법은 익히 선생이 제자를 가르치는 방법이 아닌 웃고 떠들고 잡담하는 방법이었다. 그녀는 권위적이지 않으면서 권위가 있었고 말이 무겁지 아니하고 가벼우면서도 기품이 흘렀다. 타고나기를 품이 너른 사람 같았다. 그녀가 나의 엄마이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도 있다. 강산도 변한다는 십 년의 나이 차이가 무색하게, 서로를 벗 삼았다. 통화 내용에 대단한 조언과 격언 따위는 없었다. 따뜻하고 심심한 안부 인사였다. 그게 내게 괜찮다는, 너는 안전하다는 안정감을 불어 넣는다. 내년의 우리 인연은 어떨지 모를 일이다. 간절히 오늘만 같아라하고 빌지만 정말로 모를 일임을 안다. 그래서 서로의 온기를 나눌 수 있는 지금, 내일 커피 한잔하자고 문자보낼 수 있는 지금을 촘촘히 헤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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