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는 글_1_ 평범한 직장인이 지구에서 가장 행복한 의사가 되기까지
지구에서 가장 행복한 의사의 수행과 경영에 관한 이야기. 들어가는 글-1
지인의 다락방에서 천 만원 전세로 신혼살림 시작
잘 다니던 직장을 그만 두고 수능준비를 했지만 수학은 언제나 형편없는 점수.
만삭의 아내와 다락방에서 친구네 문간방으로, 하숙집, 반지하 단칸방으로 일년에 이사만 5번.
인턴을 마치고 지원하는 과마다 낙방, 응급실에서 야간 당직 아르바이트를 하던...
이 사람은 좋은 의사가 될 수 있을까요?
저는 인생은 팩트가 아니라 해석이라고 생각합니다.
신문기자에게는 팩트가 중요하겠지만 인생을 만족하고 행복하게 사는 데는 해석이 중요합니다.
팩트로는 어느 것 하나 변변치 않지만 결과는 팩트의 총합이 아닙니다.
팩트라는 재료로 요리를 하는 것이 인생입니다. 냉장고에 먹다 남아서 버리기 직전의 음식들을 가지고도 일품요리처럼 만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무언가 진실을 알고 있습니다. 요리의 본질을 파고 든 사람들이고 재료의 특징을 통합적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그런 사람들을 일류 또는 명품이라 부릅니다. 비록 흙수저로 시작했고 아직까지 변변한 능력을 갖추지 못했더라도 우리는 언제든 시작할 수 있고 공부할 수 있습니다. 다행히 이 시대는 마음만 먹는다면 얼마든지 원하는 책과 정보를 찾을 수 있고 좀 더 부지런하다면 책의 저자를 만나 볼 수도 있고 상담도 할 수 있습니다.
제 이야기를 조금만 더 하겠습니다.
저는 원래 경영학을 전공하고 대기업에 취업하였던 평범한 직장인이었습니다. 지금은 SK로 이름이 바뀌었는데 선경 종합무역상사에서 4년간 일을 하다가 대리 1년 차에 인생의 방향을 틀었습니다.
제 젊은 날의 멘토가 IMF로 직장을 그만두고 서울에서 대구로 내려갔습니다. 생각만 해도 무시무시한 수학을 그것도 수학2까지 하는 용기를 냈습니다. 그 후 수능 시험을 다시 보고 대구에 있는 의과 대학에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나이 서른둘에 띠동갑 친구들하고 같이 의과대학 공부를 하게 됐고 힘들지만 행복한 수련을 거쳤습니다.
의사생활을 하면서 저를 불편하게 하는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진단도구가 차갑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아픈 환자를 차가운 엑스레이 테이블 위에 눞이고 뾰족하고 차가운 바늘을 찔러 피를 뽑아야 했습니다.
심지어는 따스한 심장의 목소리를 듣는 청진기 조차 차가웠습니다.
궁리 끝에 제가 가진 유일하게 따뜻한 도구, 손을 활용하기로 했습니다. 저는 자타공인하는 따스한 손입니다. 그래서 최대한 손으로 환자분들의 손을 잡고 환부를 많이 만져서 진단을 하는 재활의학과 의사가 된 것인지도 모릅니다.
지금은 대구에서 재활의학과 병원을 개업하여 11년 째 운영하고 있습니다.
당시에는 나이 서른 둘에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공부를 시작했기 때문에 아내에게 면목이 없을 정도로 힘든 시간을 보냈습니다.
처음부터 마이너스 인생이었죠.
결혼할 당시 천만 원짜리 전세 다락방에서 시작했는데 의과 대학 졸업할 때쯤 되니까 빚이 훨씬 더 늘었습니다.
그 때 당시 수련하는 전공의에게는 200만원 남짓의 월급이 수입의 전부였는데 이 과정에서 빚이 더 많이 쌓였죠. 아이가 둘, 저희 아이들을 돌봐 주시던 장모님도 큰 병을 얻어서 경제적으로는 더 쪼들리는 생활이 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마흔 셋에 전문의 자격증을 따고 1년 뒤에 개원을 했는데 그때 당시 개원할 때 빌린 돈까지 포함하니까 약 한 8억 정도 빚을 졌습니다.
결혼하고 약 한 12년간은 계속 빚만 쌓이는 생활이었죠.
제가 지금으로부터 9년 전 성장의학회에서 의사들을 대상으로 강의를 할 때 저 자신을 지구에서 가장 행복한 의사라고 처음 소개했었습니다. 저 스스로 그런 호칭을 쓰게 된 것은 빚을 다 갚고 형편이 좀 나아져서 쓴 말은 아닙니다.
저 스스로 '내가 지구에서 가장 행복한 의사구나' 이런 마음이 든 것은 빛이 계속 쌓여가고 있던 인턴, 전공의 시절부터였던 것 같습니다.
오늘도 여전히 지구에서 가장 행복한 의사 김정훈 이었습니다.
다음 월요일에 다시 만나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