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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정훈 Jul 03. 2023

분노를 슬픔으로

암환자와의 만남

분노를 슬픔으로...


'이런 미친...'


지난주 처음 만난 환자분 앞에서 하마터면 욕이 나올 뻔했다. 물론, 환자분 자신은 아니고 그분 남편이 내 욕의 대상이다.​


70이 가까운 고운 인상의 아주머님이 폐암 수술을 받고 항암치료를 끝낸 뒤 기력이 떨어지고 혈압이 높아지고, 두통이 있어서 병원에 찾아오셨다.


말씀을 들어보니 남편이 아직도 방 안에서 담배를 피운다는 것이다.​


이 환자분은 암 수술을 받고 항암치료 후에 체력이 바닥인데 방에서도 제대로 쉴 수가 없는 셈이다.


"남편도 협심증이 있어서 심장 혈관에 스텐트를 두 개나 박은 상태인데 막무가내로 저렇게 방 안에서 담배를 피우잖아요. 제 말은 안 들어요. 딸이 얘기해서 이제 겨우 베란다에서 담배를 피워요." 하시며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신다. 수십년간 남편의 줄담배를 방안에서 같이 받아내신 것이다. (물론, 비소세포성 폐암은 담배가 비흡연자에게도 많이 생기는 병이지만 담배가 암환자에게 좋을리는 만무하지 않은가? 흡연 자체도 그렇거니와 배우자에 대한 배려가 없는 남편의 태도가 내 머리 뚜껑이 열릴 만큼 분노하게 했다.)


속에서 묵직한 무언가가 뭉쳐져 올라왔다.​


분노의 덩어리였다.​


그러고는 이내 환자분 눈가에 맺힌 슬픔을 보았다.


"지난주 수술했던 병원에서 CT 검사를 했는데 아주 작은 무언가가 폐에서 발견되었다고 해요. 수술했던 교수님이 아직은 너무 작아서 조직 검사를 할 단계도 아니고 무어라 단정을 할 수 없어서 3개월 뒤에 다시 검사를 해보자고 하시네요."​


그 결과를 듣고는 CT에서 보인 작은 그것이 혹시나 재발은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든 것이다. 그 이후 잘 먹지도 못하고 제대로 자지 못해서 그런지 눈이 움푹 패이고 얼굴이 거칠어 보인다. ​


그 움푹 패인 눈가에 차오르는 슬픔을 보았다.


환자분의 깊은 슬픔 앞에서 나는 내 얕은 분노를 내려놓았다.​


환자의 슬픔에 오래된 라디오 다이얼을 돌리듯 가만가만 조심스레 내 감정의 주파수를 맞추었다.​


저 깊은 곳에서 아스라한 종소리가 들렸다.​


그 환자분의 슬픔과 나의 심장은 진동수를 맞춰가며 공명했다.​


깊은 주름살만큼이나 깊은 그 슬픔.​


그 짧은 순간에 나의 감정을 내려놓고 그분의 눈을 창문 삼아 그 속을 들여다보았다.


나는 환자분의 손가락에 낀 반지를 보고 얼른 화제를 바꾸어 환자분의 종교를 여쭤보았다.


예상대로 성당에 다니신다고 했다.​


"보아하니 열심히 하나님을 믿는 분인데 어떻게 하나님 노릇을 하시려고 하세요?"라고 하면서 남편 이야기에서 본인의 건강으로 화제를 바꿨다. ​


"하나님이 아시면 얘기를 해주실 테고, 그 교수님이 아시면 교수님이 얘기를 해주셨을 거예요. 그런데 그것만 전문적으로 보는 교수님도 모르고, 하나님도 얘기를 안 해주시는데 어떻게 환자분이 하나님 노릇을 하시려고 하세요?"​


이번에는 손을 가만히 잡고 눈을 쳐다보면서 말씀을 드렸다.​


"모르는 것은 그냥 모르는 것일 뿐이에요. 암 치료하고 체력 회복하기도 바쁜데 잘 모르는 것에 그렇게 에너지 낭비하기에는 너무 아깝잖아요?"



다행히 환자분은 내 말에 금세 수긍하셨다.​


모르는 것은 아직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뜻이다. 모르는 것을 나쁜 것으로 생각하면 실제로 그 덩어리가 나쁜 것이 아니라, 내 생각이 암처럼 자라나 그 작은 덩어리를 더 나쁘게 만들 수 있다고 알려드렸다.

"설령 그게 문제가 돼서 어떤 조치를 해야 되더라도 교수님이 어떤 치료를 하자고 하는 그 시간까지는 아무 일도 없는 거예요. 그러니 그때까지는 잘 먹고 잘 자고, 부지런히 움직이고, 흔쾌히 사시는 거예요. 피하고 싶은 그 일을 막아내는 것은 걱정이나 두려움이 아니잖아요? 경쾌한 마음으로 잘 먹고, 잘 자야 혹시 어떤 치료가 필요할 때 꿋꿋이 이겨낼 수 있죠."​


체력을 보충하기 위한 몇 가지 처방을 했다.


손을 잡고 잘 해낼 수 있을 것이라며 격려해 주었다.


감정의 선율을 타고 나는 환자의 마음속으로 들어갔다.



다음날 아침 일찍 환자분이 다시 오셔서 면역치료를 받았다.


모처럼 만에 잠도 잘 자고 혈압도 정상이 되었다며 밝은 웃음을 보여주셨다. ​

나는 슬픔이 기쁨의 문이라고 믿는다.


이번에는 나의 슬픔이 아니라 환자분의 슬픔이라는 차이가 있을 뿐.



슬픔을 피해서 달아날 곳도 없는데 그 문 앞에서 주저하거나 외면한다.


어디 그 환자분 뿐이겠는가?


나도 슬픔을 피하려고 쓸 데 없이 에너지와 시간을 얼마나 많이 소모해 왔던가?​


다행스럽게도 나는 환자분의 큰 슬픔 앞에서 나의 작은 분노를 내려놓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분의 감정 안으로 들어가서 나는 또 하나의 세계를 경험하게 되었다. ​


나의 감정을 상대의 감정으로 바꾼 것이 나에게도, 그분에게도 복이 되었다.​


진료실에서 그분은 조곤조곤 말씀하신다.

"어젯밤에 감사 기도 다섯 가지를 하는데, 원장님을 만나서 정말 감사하다고 기도를 했어요. 이제 새로운 삶이 시작되는 것 같아요."



어쩌면 이것도 인지행동치료의 일환이지 않을까?


환자와 손을 마주 잡고 그 눈을 바라보며 환자의 감정에 내 심장의 주파수를 맞출 때 상대의 감정이 고스란히 파동처럼 밀려온다. 더 이상 환자도 '너'가 아니고, 의사도 '나'가 아니다. 그러면 나의 슬픔과 너의 슬픔이 차이가 없는 지점이 있다.



우리는 그렇게 하나로 만났다.

태초부터 그렇게 하나였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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