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재수학원 이야기

지구에서 가장 행복한 의사(5)

by 김정훈
지구에서 가장 행복한 의사 다섯 번 째 이야기 "재수학원 이야기"
재수학원 이야기

망할 놈의 수학.


나는 재수전문 종로학원 종합반에 들어가서 최선을 다해 공부를 했지만 다른 과목은 다 공부하는 대로 점수가 나오는데 수학만은 정말 마음대로 되지를 않았다. 최종 수능 성적에서 오답의 3분의 2가 수학이었다. (요즘처럼 몇 문제 틀리면 아예 꿈도 못꾸는 분위기이면 나는 아예 포기했어야만 했을지도 모른다.) 하루 공부시간의 80%는 수학에 투자했는데도 이과 수학까지 한다는 건 정말이지 만만치 않았다.


그림2.png

그렇지만 고등학교 때 전혀 취미가 없었던 화학이나 물리에는 새롭게 눈을 뜨기 시작했다. 정말 원리를 알고 나니 물리는 재미있는 공부였다. 물론 아주 고차원적인 물리는 모두 수학적 개념을 바탕으로 깔고 있지만 고등학교 수준의 물리는 그 정도의 고등수학은 필요가 없었기에 사물의 원리만 깨우치면 실험내용도 답도 비교적 쉽게 이해하고 찾을 수 있었다.


나는 하루 공부의 80%를 수학을 해도 수학으로만 치자면 우리 반에서 하위권이었다. 그나마 언어와 영어는 특별히 공부 안 해도 점수가 잘 나와서 전체로 치면 중간 정도.


근데 내 짝꿍은 정반대였다. 내가 물리 문제를 물어보면 전부다 수학식으로 써준다. “내가 이게 무슨 말이냐? 우리말로 설명을 해보라.”고 하면 “수학식으로 하면 간단한 걸 말로 하면 너무 길다.”고 난감해 했다. 그 친구에겐 수학식이 자신만의 언어인 셈이었다. 반대로 그 친구는 언어영역이 젬병이었다. 120점 만점에 늘 90점~100점 사이에서 왔다 갔다 했다.


그 친구는 그 전해에 언어영역을 120점 만점에 98점을 맞았는데 그것 때문에 자기가 가고 싶어 하는 서울대 물리학과를 가지 못하고 연세대 공대를 갔다. 올해 기필코 언어영역에서 점수를 올려서 서울대 물리학과를 가겠다고 재수를 하는 것이다. 수학이나 과학으로 치자면 이 친구는 고등학생 때 서울대 공대를 다니는 자기 형의 숙제를 대신할 정도로 탁월했는데 그 놈의 언어영역에 발목이 잡혀서 하고 싶은 공부를 못하는 게 너무도 안타까워 보였다.


물리학자가 되고도 남을 녀석에게 시까지 완벽하게 감상하라고 하는 것은 너무 무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녀석은 학원에서도 죽자고 언어공부, 주말에는 단과반에 가서 또 언어공부... 한 달에 문제지 족히 5권 이상은 풀었을 것이다. 하지만 시를 감상할 줄 모른다는 것이다. 나에게 물어보면 "작가의 상황이 이러니까 이런 마음으로 쓰지 않았겠냐?"라고 하면 "아~ 그래요?" 해놓고는 다음에 가면 또 깜깜이가 되는 것이다. 마지막 모의고사에서 처음으로 언어가 110점이 나와서 뛸 듯이 좋아하던 순진했던 그 녀석 생각이 난다.


그러나 결국 수능에서는 120점 만점에 100점. 일 년 내내 언어에 매달려 더 얻은 점수가 고작 2점. 그 전해 보다 수능성적이 전반적으로 오른 것을 감안하면 아무것도 얻은 것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녀석은 결국 서울대 물리학과에 탈락했고 다시 연세대 공대로 가게 되어서 모두가 안타까워했다.


그런데 후일 들으니 추가로 서울대 물리학과에 합격해서 3년인가 3년 반만에 조기졸업 하면서 복수전공으로 경제학까지 해서 당시에 뉴욕대에서 경제학 박사후 과정을 밟고 있다고 한다. 그 친구가 연세대 공대를 가서 엔지니어링 회사나 어느 전자회사를 들어갔다면 얼마나 아까웠을까? 개인적으로도 그렇고 사회적으로도 큰 손실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비단 이 친구 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는 "골고루 1등급"을 선호해서 이런 천재들이 한 분야에서 좀 서툴다고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는 일이 많은 것 같아서 안타깝다.


어쨌든 나는 그 친구와 함께 공부하면서 물리와 화학 등 과학의 재미를 알게 되었고 그 때의 공부가 지금도 내게는 많은 도움이 되고 있다.


그런데 수학은 내가 그렇게 고생을 하면서 조금 성적을 끌어올리기는 했지만 지금 내가 진료를 하고 연구를 하는데 별 도움이 되는 것 같지는 않다. 나는 왜 의과대학생을 뽑을 때 거의 전적으로 수학을 잘하는 학생을 뽑아야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일부 연구소나 실험을 전공하는 의사에게도 고등학교 시절의 수학이 의사의 자격을 결정할 만큼 중요한 요소인지 의문이 든다.


오히려 임상의사에게는 과학 이상으로 철학, 심리학 등 사람 그 자체를 이해하는 인문학과 감정을 함께 나누는 방법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의과대학을 이과라고 애초에 나눠서 생각하는 이분법은 온당치 않다고 생각한다. 의대 학장님들이 모여서 이 문제에 대해 고민하시고 선포하는 날이 오기를 기대한다. “앞으로 의과대학에서는 학생들의 수학성적은 입학 자격에 전혀 반영하지 않겠습니다. 인문학과 심리학 등 사람을 잘 이해하고 공감하고 실천하는 사람을 뽑는 방법을 고민해 보겠습니다.!” 라고 하면 얼마나 좋을까!


어쨌든 그 때 직장을 그만두고 재수학원을 다니면서 원룸의 보증금을 다시 빼서 대출을 갚고 난 뒤 형규형의 빌라 바로 아래층 관영이 형의 작은 방에서 몇 달, 안양에 있던 절친 병훈이네 열 몇평 되는 작은 아파트 문간방에서 며칠을 보냈다. 당시 병훈이도 신혼살림인데다가 수영이가 갓난 아기여서 빠듯했을텐데 내가 지낼 곳이 없다고 하니 방이 두 개밖에 없는 그 조그만 집에서 방 하나를 내주었다. 지금 생각해도 감사를 말로 다 하기 어렵다.

그림3.png

배가 불러오는데 도봉구에 있던 아내의 직장까지 통근시간이 너무 길어서 힘들어 보여서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이문동 언덕위에 있는 하숙집을 구했다. 어차피 밥을 해먹기도 쉽지 않은데 둘이 같이 하숙을 하면 밥도 해결되겠다 싶어서 편할 것 같아 그렇게 결정했다.


용달차를 부르면 몇 만원 나가니까 오천원을 주고 리어카를 빌렸다. 이미 큰 짐은 모두 대구 본가로 부치고 옷가지와 책들만 라면상자에 넣었더니 모든 이삿짐이 약 스무 상자 정도 되었다.


이 정도야 리어카로도 옮기겠다 싶어서 시작했는데 아뿔싸... 언덕이 아닌가!!


아내는 어차피 임신한 상태고 출근을 해야하니 나 혼자서 이사를 하기로 마음 먹었는데 한 시간에 오천원으로 빌렸는데 아무리 힘을 써도 혼자 힘으로는 언덕을 올라가기가 쉽지 않았다.


그렇게 몇 번을 왔다 갔다 했더니 한 시간이 훌쩍 넘었는데 추가요금을 더 내지 않으려고 빈수레를 정말 요란하게 몰고 뛰던 생각이 들면 지금도 숨이 가빠 온다.

그림4.png

하숙집 아주머니는 아주 철저한 사람이었는데 날씨가 아직 겨울이 아니니까 온수를 틀어주지 않는 거다. 나야 괜찮지만 가을이 되니 만삭인 아내에게 냉수는 아주 견디기 힘든 일이었다. 수능시험 날짜는 다가 오고 그것 때문에 갑자기 환경을 바꾸자니 쉽지 않은 일이어서 울며 겨자먹기 식으로 수능시험 날까지 버텼다.


이윽고 수능 전날. 하루 만 더 시간이 있으면 전체를 다 한 번 더 볼 수도 있을 것 같은 아쉬운 마음도 있었고, 이제 끝이 보인다 싶은 마음도 있었고, 혹시 안 되면 어떡하나 싶은 불안감도 있어서 뒤숭숭했었는데 아내는 나를 철썩같이 믿고 있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나는 불안한데 아내는 단 1%도 내가 합격하지 못한다는 생각을 해보지 않았다고 한다.

그림5.png

드디어 수능 날, 아내는 애틋한 눈빛으로 응원해 주었고 나는 그날 아침과 점심도 거의 먹지 않고 초콜릿바 하나로 버텼다. 소화가 잘 될 것 같지 않아서 아예 먹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시험을 어찌어찌 치르고 집에 와서 답안을 맞춰 보니 틀린 점수 중에 수학이 3분의 2 정도 되었다. 그래도 작년 점수와 비교하면 넉넉하게 대구에 있는 의과대학에 합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며칠이 지나면서 분위기가 바뀌기 시작한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