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에서 가장 행복한 의사(6)
지금 돌아보면 어처구니 없는
그 일을 그 땐 어찌그리
아무런 거리낌 없이
그렇게 시작했는지
신기하기만 합니다.
결국 전혀 다른 길...
상상조차 하지 않았던 길을
새롭게 걷게 되었습니다.
지구에서 가장 행복한 의사 : 여섯번째 이야기 "서른 두 살 아기 아빠, 드디어 의대생 되다"
서른 두살, 아기 아빠 드디어 의대생이 되다.
수능 난이도 조절 실패, 의대 커트라인 엄청나게 올라
수능시험이 끝나고 며칠이 지나면서 수능성적의 인플레이션이 심하다는 것이 점차 밝혀진다.
난이도 조절에 실패하면서 의과대학 커트라인이 엄청나게 오른 것이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대구와 경북권에 있는 의과대학에 모두 원서를 썼다.
1차에서는 모두 탈락 ㅠ.ㅠ.
역시 수학에서 입은 타격을 극복하지 못하는가 싶었다.
설마 하나는 붙겠지 했는데... 가슴이 조여오기 시작했다.
동국대 의대 추가 합격...그리고 또 한 명 추가된 가족
그렇게 조마조마하며 며칠이 지나고 다행히도 경주 동국대 의대에 추가합격이 되었다는 통지를 받았다. 조여오던 가슴이 한결 가벼워지긴 했으나 통학을 하기에 대구에서 경주는 너무 먼 거리였다. 그렇다고 우리 형편에 차를 살 수도 없었고...
12월 말이 되어 드디어 아내가 산통이 시작되었다. 친정 근처의 산부인과에 갔는데 담당의사선생님이 야간에 콜을 받고 나오셨다. 선생님 말로는 산도가 잘 열리고 있으니 자연분만이 가능할 것 같다고 하셨는데 진통이 너무 오래가는 것이다. 열 시간이 넘었는데도 아기가 나오지 않으니 아내는 너무 고통스러워 "수술을 받자"고 했다. 근데 담당 의사선생님은 "아니다. 거의 다 됐다." 하시며 자연분만을 고집했다.
그러기를 무려 세 시간... 그 때 세 시간이 군대에서 화생방 훈련 때 가스실에 있던 시간보다 견디기 힘든 시간이었다. 결국 열 세시간 만에 아내는 분만장으로 들어갔고 진통이 오래 가면서 아내가 힘이 딸렸던 터라 의사 선생님 한 분이 더 나오셔서 두 분이서 힘을 합해 겨우 자연분만을 할 수 있었다.
결국 아내는 무사히 건강한 아들을 낳았다.
그 때 교회에서는 겨울집회를 하고 있었는데 나는 목사님께 아기 이름을 부탁했고 목사님은 종이에 "金言約" 이라고 써 주셨다. 그 해 겨울집회 제목이 "새 언약의 중보이신 그리스도"였다.
그렇게 우리에게는 새로운 식구가 선물처럼 주어졌다.
아기는 가장 큰 입학선물이었다.
계명대 의대 추가합격... 아! 대구에 있을 수 있게 되었다.
새해가 시작되고 20여일 쯤 지났을까 대구에 있는 계명대학교에서 추가합격 했다는 연락을 받았다.
휴~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었다.
갓 태어난 아기와 떨어져 멀리서 공부하지 않아도 되어서... 그토록 원했던 대구와 교회를 떠나지 않아도 되어서 정말 다행이었다.
바로 목사님께 전화를 드렸더니 자기 일처럼 좋아하시며 연신 "잘 되었다. 정말 잘 되었다." 하시면서 흡족해 하셨고 교회앞에서 자랑스럽게 광고를 하셨다.
계명대학교는 기독교 재단이기도 하고 100년의 깊은 역사를 가진 병원이 있어서 의과대학 그 자체로도 매력이 있는 곳이었다.
나는 서른 두살, 갓난아기의 아빠가 되어 의과대학생이 된 것이다.
단 1%도 의심하지 않았던 아내의 철썩같은 믿음 그대로 된 셈이다..
아내는 직장 때문에 다시 서울로 ㅜ.ㅜ
아내와 나는 부모님이 사시던 낡은 주택에서 반 년 넘게 갓난 아기와 함께 생활했는데 겨울에 찬바람이 너무 많이 스며 들어와서 아무리 방바닥을 덥혀도 방안 공기가 따뜻해지질 않아서 애를 많이 먹었다.
아내는 몸조리가 끝나자 2월에 서울에 있는 직장으로 다시 복귀하게 된다. 대구지역으로 이동하기 위해 백방으로 알아 보았으나 좀처럼 쉽지 않았다.
아직 젖먹이인 아가를 떼어 놓고 주말이면 기차로 내려왔다가 하룻밤을 자고 불은 가슴이 채 가라앉지 않은 채로 다시 올라가는 아내의 마음이 오죽했으랴?
지금처럼 KTX가 있는 것도 아니고 토요 휴무도 없던 때이니 고단한 것은 물론이고 그렇지 않아도 무서움을 많이 타는데 서울역에서 내려서 도봉산까지 그 먼 거리를 다시 지하철을 타고 아무도 없는 어둑한 반지하 셋방을 향해 밤길을 걸어야 했던 아내를 생각하면 나도 가슴이 쌔~하고 따끔 거렸다.
동대구역에서 기차에 아내가 타고 창가에 얼굴이 비치면 창문을 더듬기도 하고 기차가 서서히 출발하면 같이 따라 뛰면서 손을 흔들고... 아주 오래된 신파극 같지만 그 땐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마음이 너무 쓰렸다.
어떤 날은 밤에 서울에 도착한 아내가 집에 도착하니 너무 무섭다고 전화가 왔다. 나는 부모님께 아기를 맡겨 놓고 밤기차를 타고 서울까지 올라갔다. 자정이 넘어서 아내 혼자 있는 반지하 단칸방에 도착했다. 아내를 꼭 끌어안고 잠깐 잠들었다 일어나 새벽같이 다시 대구로 내려와 학교를 가기도 했다.
어쩌다 휴일인데 아내가 피곤해서 대구로 오기 어려운 날이면 서울로 올라가 조촐한 밥상을 준비하고 같이 나눠 먹으며 아내의 외로움을 대신 채우려고 했다.
아내가 출근한 뒤 대구로 내려오기 전에 내가 가고 없어도 이 방이 무언가 가득찬 느낌을 주고 싶었다.
가진 돈은 얼마 없고 어떻게 하면 가득차고 허전한 느낌을 주지 않을까 생각하다가 문방구에서 풍선을 샀다. 수십개 색색의 풍선을 불어서 집안을 채우고 빈 방 여기 저기 엽서를 써 놓고 내려왔다. 색색의 풍선이 내 마음처럼 반지하 어둑한 방을 가득채우길 바라면서...
꿈같은 그 시절... 반지하 셋방에서 여름휴가를...
의예과 1학기를 지나고 여름 방학이 되어 아기를 데리고 서울에 있는 아내의 반지하 셋방으로 피서를 갔다.
아내는 출근하고 나는 아기와 함께 하루 종일 아내를 기다린다. 더운 여름 에어컨도 없는 반지하 셋방에서 뒹굴거리다 답답하면 유모차를 끌고 동네 나무 그늘 밑으로 산책을 나간다.
아내의 퇴근 무렵이면 지하철 역 근처에서 왔다갔다 하다가 아내가 나오면 마치 월드컵 우승컵을 가지고 오는 선수단을 맞이 하듯이 열렬히 환영한다.
한번은 점심을 같이 먹기 위해 아기를 들쳐 업고 아내의 사무실로 들렀다.
아내의 상관인 과장님이 반갑게 맞아 주시며 "아기랑 하루 종일 같이 있으니 귀엽기도 하지만 힘들죠?"라고 하셨다.
아뇨, 힘들지만 귀엽습니다! ^^
라고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인생이 어찌 늘 편안할 수만 있을까!
인생은 결론이 중요하다. 고단하지만 의미가 있을수도 있고, 의미가 있을수도 있지만 고단하다는 곳에 방점을 두고 끝날 수도 있다.
인생이 어떻게 늘 편안할 수만 있겠는가!
그렇지만 늘 의미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편안함을 쫒는 인생은 어쩌면 하루도 편안하지 못할 수 있고 의미를 찾는 사람은 평생을 가치있게 살 수도 있다. "항상 편안함"을 추구하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기도 하지만 한 편으론 어리석은 욕심이기도 하다. 그 보다는 "항상 의미가 있기를" 바라는 편이 더 현실적일 것 같다.
당시 내게는 아기와 함께 하는 시간... 학기 중에는 눈맞춤하기도 빠듯했던 생활을 보충하기 위해 그 무더운 여름 내내 반지하 월세방에서 하루 종일 같이 놀고 뒹굴거리고 산책하고 엄마를 기다리고 했던 것이다.
더운 여름날, 인간 냉장고
하루는 올 해 여름 날씨처럼 너무 더워 아내가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하는 날이 있었다.
에어컨은 언감생심, 선풍기도 없었다.
뒤척거리는 아내를 보며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욕실에서 차가운 물로 약 10분간 샤워를 했다. 샤워를 하고 나니 피부가 서늘해져 있었는데 그 상태로 아내를 안고 인간냉장고 작전을 펼친 적이 있다. 다행히 서늘한 기운 때문인지 내가 안아 줘서 그런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아내는 잠이 들었다.
아기와 함께 다시 대구로 생이별...
그렇게 여름이 지나가면서 짧았던 서울에서의 모자 상봉 시간이 끝나고 나와 아기는 아내를 두고 다시 대구로 내려오게 되었다.
우리를 보내야 했던 아내의 그 복잡한 표정을 나는 잊을 수가 없다.
도저히 사람이 할 짓이 못되었다.
아내도, 나도.
아무리 공무원이 안정적이고 좋다 해도 이렇게는 도저히 살 수가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결심하게 되었다.
또 한번 용감하게,
그리고 무식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