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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보나 Oct 19. 2020

그의 마지막 노래

004. 큰아버지

엄마는 내게 새벽 1시가 고비이니 미리 채비를 해두라고 전했다.
나는 하루 종일 티브이도 켜지 않고, 음악도 듣지 않고, 스탠드 불빛만 밝힌 고요한 방 안에서 뜬 눈으로 침대에 누워 있었다. 자정이 넘어가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때를 맞춘 비 같았다. 머리가 너무 아파서 진통제를 먹고 까무룩 잠이 들고 말았다.

새벽 2시쯤 전화벨 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라며 눈을 떴다. 받지 않아도 그것이 부고(訃告)임을 알 수 있었다.
엄마는 내가 다시 울음을 터뜨릴까 봐 달래듯이 차분한 목소리로 알렸다. 아빠가 곧 데리러 갈 거라고 했다.

새벽에 오는 전화는 불길하다는 걸, 나는 어렸을 때 체득했다. 고요한 공기를 가르며 울리는 벨소리는 깜깜한 방에 불을 밝히고 어른들을 허둥대게 만들었다. 급히 옷을 챙겨 입고 집을 나서게 만들었다.

예감하고 있었음에도 나는 큰아버지의 부고 앞에서 허둥댔다. 허둥대는 몸짓으로 머리를 감고, 이미 챙겨놓은 가방에서 물건을 넣었다 뺐다 하며 방을 어질렀다. 나는 검은 옷을 입고 덜 마른 머리를 질끈 묶고 창백한 얼굴로 집을 나서 아빠 차에 올라탔다. 비가 계속 내렸다. 아빠는 일상적인 투로 요즘 회사 일은 어떻냐고 물었다. 매일같이 전화해서 묻는 말이었다. 나도 언제나와 같은 대답을 했다. 딸을 태우고 달리는 아빠는 그 순간에도 형의 죽음을 맞닥뜨린 막냇동생이 아니라 나의 아버지여야 했기 때문에 울지 않았다.

아빠는 가족이 다 같이 외출할 때면 언제나 재촉하는 사람이었다. 나머지 가족들은 언제나 준비가 빠른 아빠의 시간에 맞추지 못할까 봐 허둥대며 문을 나서기 일쑤였다. 앉지도 못하고 서 있는 가족들을 바라보며 아빠는 서두를 것 없으니 천천히 준비하라며 밥을 한술 뜨셨다. 나는 아무것도 먹지 못할 것 같아 그냥 맞은편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엄마는 장례식장에 도착하자마자 큰어머니를 부둥켜안고 오열했다. 남자 어른들은 장례 절차를 논의했다. 나는 그냥 혼자 섬처럼 떨어져 앉아서 울었다. 완연한 아침이 되자 큰아버지의 이름이 화면에 게시되고 영정사진과 꽃이 준비되었다. 조문객이 밀려들어왔고 나는 붉어진 눈으로 음식을 차리고 치우기를 반복했다. 그러다 잠시 한가해지면 사진 앞에 앉았다. 사진 속 얼굴이 완연한 노인이 아닌 중년의 모습이라 볼 때마다 억울함이 가슴을 치고 올라왔다.

큰아버지가 쓰러지기 전에 마지막으로 하신 일은 노래였다. 원래 흥이 많은 형제들이었다. 이장이었던 그는 마을 체육대회에서, 마을 사람들과 술 한잔을 걸치고 흥이 올라 마지막 순서로 마이크를 잡았다. 그리고 긴 노래를 부르무대에서 내려오자마자 "물 한 잔 주소" 하고는 쓰러졌다. 햇빛이 뜨겁다 못해 아팠을 시간에 그늘막 하나 없었다고 한다. 큰어머니는, 평소에 1절만 부르던 사람이 그날은 기분이 좋았는지 2절까지 부르더라고 했다. 큰아버지는 그것이 자신의 마지막 노래였음을 알고 있었을까.

입관은 월요일 오전 10시였다. 입관 전에 아빠가 날 따로 부르더니 내 손에 만 원짜리 한 장을 쥐어주셨다.
이따가 큰아버지 보내드리기 전에, 가시는 길에 친구들 만나서 맛있는 것도 먹고 기분 좋게 가시라고 넣어드리라고 했다. 그리고 만 원짜리를 받아 드는 내게 한마디 덧붙이셨다.


"너도 큰아버지 살아계실 때 용돈 많이 받아쓰지 않았냐."


후회가 밀려왔다. 쑥스러워도 큰아버지께 용돈이라도 한번 드릴 걸. 아빠 말이 맞았다. 명절 때마다 큰집 가면 용돈 자주 받았는데, 왜 취직하고 나서 한 번도 갚아드릴 생각을 못했을까.

큰아버지의 마지막 표정은 평안했다. 나는 그게, 마지막으로 하신 일이 노래하는 일이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했다.
사람들은 큰아버지가 태어났을 때 터뜨렸을 울음보다 더 크고 길게 울었다. 아빠도 그제야 울기 시작했다. 노인들이 어린아이처럼 울었다.

나는 큰아버지의 가슴 위에 만 원짜리 한 장을 올려드렸다. 더 일찍 드리지 못해 죄송해요.
집안 어른이 날 돌려세웠다.


"아가, 너무 오래 쳐다보고 있지 말어라. 너도 집에 가면 몇 날 며칠 잠 못 잔다." 


그래서 나는 뒤돌아서 울었다.

밖에서 기다리고 있자 사촌오빠가 나와서 말했다. 이제 마지막이니, 평소 아버지가 여러분께 서운하게 한 거 있으시면 여기서 모두 털어버리시고 보내달라고 했다. 마지막 말은 거의 울음에 묻혀서 들리지 않았다. 그게 오빠의 울음인지 내 울음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나는 오빠한테 그런 게 다 무슨 소용이냐고 말하고 싶었다. 오빠, 이제 와서 우리의 미워함과 미워하지 않음이 무슨 소용이냐고. 그렇지만 그건 문장으로 만들어질 수 없는 슬픔이었다.

 

장의사가 마지막으로 가족들을 다시 들이고, 이제 정말 마지막, 다시는 보지 못할 거라고 말했다. 우리는 모두 그곳에서 묵념했다. 모두가 침묵하고 있었지만 울고 있지 않은 사람은 없었다.

큰아버지가 평생 일구신 땅 한편에는 가족납골당이 있다. 그해 3월 친척들이 다 모여서 할아버지 할머니 제사를 지낼 때, 큰아버지가 농담처럼 당신 위패를 미리 만들어 놔야겠다고 말씀하셨다. 위패를 미리 만들어 두면 오래 산다고. 큰어머니는 그런 걸 왜 만드냐며 질색을 하셨다. 그게 살아생전 내가 뵌 마지막 모습이었다. 기독교이신 큰아버지가 당신의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의 위패 앞에서 묵념할 때 종교가 없는 나는 그 옆에서 절을 올렸었다. 그것이 그분이 살아서 드린 마지막 묵념이었음을 나는 꿈에도 예감하지 못했다. 다음 해 3월에는 모두가 그분의 위패 앞에 절을 올리고 묵념을 하게 될 것이라는 것도.

나는 발인 전에 혼자 집으로 돌아왔다. 여섯 시간을 버스에 몸을 싣고 있었다. 돌아오는 길에도 계속 비가 왔다. 날 돌려세우던 어른의 말씀처럼 혼자된 방 안에서 나는 잠이 들 수 없었다. 작은 빛에도 예민해서 잠들지 못하는 나는, 그날만은 불을 모두 켜 둔 채로 피로를 견디지 못해 잠이 들었다. 꿈에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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