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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보나 Oct 21. 2020

최종학력은 '국졸'입니다

005. 민기

이민기 씨는 1961년에 5 1  5남으로 태어났다. 민기의 동생인 이경순 씨는 민기의 어머니가 아들 다섯을 줄줄이 낳은 끝에 얻은 딸이었다. 아버지  씨는 아들들에게는 무척 엄한 아버지였지만 이른바 '고명딸' 경순에게만은 한없이 자상했다. 이는 경순이 다섯  무렵이 되도록 엄마 젖을 찾는 폐단의 원인이 되었다. 하지만 5 1 사태의 가장  피해자는 역시   집안의 막내아들인 민기였다. 그리고 그는 나의 아빠다.

규는 아들이 다섯이나 줄줄이 있었기에 민기에겐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규의 머릿속에 민기는 그저 부려먹을 만한 일꾼이었다. 민기는 국민학교에 다닐 때부터 학교에 다녀오면 깔을 베고 일을 하는 천생 일꾼으로 자랐다. 그의 작은 몸은 점점 다부져졌다. 민기는 중학교에 가고 싶었다. 하지만 중학교 교육이 의무가 아니던 1970년대에는 중학교에 가려면 돈이 필요했다. 아들이 다섯, 딸이 하나. 5남에게는 형들과 달리, 여동생과 달리, 친구들과 달리 중학교에  기회가 돌아오지 않았다.

대신 민기는 친구들과는 조금 다른 방법으로 중학교에 갔다. 국민학교를 졸업한 그는 집안 살림에 보탬이 되기 위해 잡부가 되어 학교의 이곳저곳을 고치는 일을 했다. 사람들은 무엇이든 망가지면 민기를 불렀다. 하지만 학생이 아니었기 때문에 당연히 수업을 들을 수는 없었다. 물건을 고치는 일은 배워도, 친구들처럼 책을 펼쳐 놓고 국어, 수학을 공부할 수는 없었다.

친구들처럼’.
그렇다. 민기의 국민학교 동창들은 중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민기는  아이들과 둘도 없는 친구였고 한때는  무리에 속해 있었지만, 학생과 일꾼으로 처지가 달라지면서 친구들을 피해 다니기 시작했다. 학교에서 일하다가 친구들을 마주칠까   고개를 숙이고 다녔다. 교실에서 뭐라도 고쳐야 하는 상황이 오면, 혹시라도 친구들이 자신을 볼까  가슴이 두근거렸다. 민기는 창피했다. 잡부로 일하는 자신의 처지가, 국민학교밖에 다니지 못한 자신의 학력이.

교복을 입고 지나가는 친구들이 한없이 부러웠다.
민기는 자신도 학교에 가고 싶다고 선규에게 울면서 말했다. 하지만 규는 돈이 어디 있냐고, 네가 무슨 학교냐고, 호랑이처럼 호통을 쳤다. 민기는  울었다. 그리고 마음을 접었다. 기술을 배우기로 했다. 이미 학교를 졸업한 형이 중장비를 운전하고 있었다. 그는 형의 조수로 들어갔다. 이때 담배를 배웠다.

공부를 하지 못한 아픔은 오래도록 민기를 괴롭혔다.
학력을 밝혀야  자리에 가면 오래전 중학교에서 잡부로 일하던 자신으로 돌아간  같았다. 가슴이 두근거리고 '국졸'이라는 사실을 들킬까  마음을 졸였다.

"아빠, 학교에서 가정 조사서 써오래. 최종학력 뭐라고 ?"

내가 물을 때마다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고등학교라고 ... 그냥."

아빠는 항상 ‘... 그냥’이라고 말했다.  의미를 나는 고등학생쯤 되어서야 알게 되었다. 아빠의 최종학력은 국민학교 졸업이었다. 그리고  사실이 내가 아빠에 대해 느끼는 가장 자랑스러운 부분이 되었다.


민기의 이야기에는 한 가지 반전이 있다. 형 밑에서 조수로 일하며 중장비 기술을 배운 민기는 자신의 포크레인을 빚을 지고 구입해 전국 팔도를 돌아다니며 일했다. 그러다가 충청도에 탄광 공사를 하러 갔을 때 한명숙 씨를 만났다. 명숙과 결혼해서 서울에 살림을 차렸다. 작은 단칸방에 둘이 살았다. 민기는 아버지에게 서울 구경을 시켜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더 늦기 전에 해야  것 같았다.


 길로 고향에 내려갔다. 규는 손사래를 치며 서울에 가기를 거부했다. 먼길 가기 귀찮다는  표면상 이유였지만 나는 어쩐지 아무것도 해주지 못한 막내아들에 대한 미안함과 죄책감도 있지 않았을까, 조심스럽게 할아버지의 마음을 추측하게 된다. 민기는 한사코 사양하는 규에게 비장의 무기를 꺼내놓았다.


“아버지, 제가 비행기표 사놨습니다. 서울 구경 가십시다.”


다음 날, 선규는 한복 자락을 휘날리며 고무신을 신고 광주공항으로 향했다. 동네 사람들이 답지 않게 먼 길을 떠나는 듯한 선규에게 연신 물어댔다.


“아따, 거 어디 가쇼?”

“아아니, 자꾸 서울을 가장거 내가 안 갈라 그랬드니 우리 막둥이가 비행기표를 사 와서 놀러 가네!”


선규는 동네 사람들에게  목소리로 자랑했다. 선규는 그날 난생처음으로 광주공항에서 비행기를 탔다. 그 공항은 그가 일제강점기  강제 징용되어 지은 건물이었다.


아빠는 얼마 전에 나에게 자신이 국졸이라는 사실이 부끄러웠다고 고백했다. 평생 처음 해보는 고백이었다. 하지만 아빠는 지금 친구들 중 누구보다 돈을 많이 벌고 여행도 많이 다닌다며 이제 아무것도 창피하지 않다고 했다. 아쉬움은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는 내가 학교에 다닐 때 용돈을 주지 않았다. 애들은 강하게 커야 한다며, 필요한 생활비는 모두 벌어서 쓰라고 했다. 나는 과외 아르바이트를 세 개씩 뛰며 생활비를 충당했다. 하지만 그가 내게 ‘학비’를 내게 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생활이 어려워져서 학비를 내지 못하는 상황이 되었을 때는, 잠깐 휴학을 하게 할 망정 학자금 때문에 빚을 지게 하지는 않았다. 어쩌면 아빠는 나만은 서럽게 배우지 않기를 바랐을 지도 모른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고백하면서 그는 소주를 한잔 마셨다. 아빠는 매일 소주를 한두 잔씩 마신다. 나는  그걸로 그에게 잔소리를 했는데, 이제는 한 잔쯤 내가 따라줘도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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