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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줄리 Aug 08. 2016

우리들, 그들이 사는 세상

꿈과 희망이 가득한 파란 나라를 강요하는 사회

"엄마, 그랜져 말고 마티즈로 갈 거야? (한숨)"

"...아니 그랜져로 갈 거야…." (땀)

"그치? 아 난 또...(안도)"



방년 9세 (19세 아님) 조카가 자기 여친을 감히 마티즈로 모실 거냐는 불만을 가득 담아 내뱉은 대사인데, 난 우리 조카가 차를 워낙 좋아해서 앞서가는 아이인 줄 알았다. 영화 우리들을 보고 내 어린 시절을 고스란히 떠올리기 전까지는. 언니가 해준 말은 그냥 귓등으로 흘려버린 거지.


"아가씨, 요즘 애들 장난 아니에요~"






19금 영화보다 섬뜩한 전체관람가

흔히들 영화 시작 후 5분이 성패를 가른다고들 하는데 나는 평소에는 이에 공감하지 못했었다. 처음 5분은 별로였는데 내게 인생영화가 된 작품들도 있기 때문인데, '우리들' 만큼은 이 공식이 딱 맞아떨어지는 듯하다. 초반부 5분이, 초딩들의 귀여운 투닥거림 정도를 다룬 영화겠거니 하고 영화관을 찾은 나의 순진한 예상을 와장창 깨트렸기 때문이다.



피구게임의 편을 가르는 단순한 장면이지만 반에서 왕따인 주인공 선의 처지를 이처럼 정확하게 보여줄 수 있는 상황 설정이 또 있을까?


영화를 본 직후에는 대개 일정 정도의 흥분상태(.. 좋은 영화를 보면 흥분하는 이상한 사람)라서 객관적이지 못하거나 좁은 시야의 글이 써지기 때문에 보통 일주일 정도 숨을 고르고 천천히 생각한 후에 메모장을 켜게 되는데, 우리들을 본 지 6일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 영화의 초반부보다 더 적합한 다른 설정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확신이 든다.


자신의 이름이 불리길 기다리는 주인공 선의 표정 변화 하나로, 나 또한 겪었었던 오래전 사건들의 한 조각이 되살아났기 때문이다. 그냥 '귀여웠던 초딩시절'이라고 미화시키고 접어두었던 그때의 공기가.



여왕벌과 일벌, 그리고 애벌레 한 마리

영화 속에는 일명 '여왕벌'이라고 불리는 반 내에 왕따를 주도하는 친구가 한 명 등장한다. 그리고 적극적으로 이에 동조하는 일벌들과 방관자들, 마지막으로 '왕따 애벌레' 한 마리가 있다. 여기서 주목할만한 점은 여왕벌이라는 위치는 부던한 노력을 통해 획득한 1등 칸이기 때문에 웬만해서 위치 전복은 없지만, '왕따 애벌레' 자리는 수시로 변한다는 것이다. (뭐 가끔 쿠데타를 통해 새 시대를 꿈꾸기도 하지만 그땐 이미 너무 많은 핍박과 수탈을 당한 이후이기도 하고, 여왕벌이 도를 넘어 폭정을 하지 않는 이상 반역 자체가 진행이 어렵다.)




선과 지아는 저 마지막 꼬리칸인 왕따 자리를 두고 엎치락뒤치락하게 되는데, 이 또한 '정치'의 일환이라고 봤을 때, 저들의 사회 또한 지금 내가 살아가고 있는 '어른'의 세상과 다를 게 하나도 없구나 깨닫게 되었다. 즉, 선이네 반은 거대한 사회의 축소판으로 ‘라인’을 만든 사람, ‘라인’에 기생하는 사람, ‘라인’에 기생조차 할 수 없는 사람이 공존하는 곳인 것이다.


생각해보면 분명히 다들 저런 치열한 세계를 경험하고 성장해왔을 텐데, 우리 모두 나이가 들어가며 어린 시절을 너무 미화해왔었다 싶다. 비린내 나는 부둣가를 꿈과 희망의 디즈니랜드로 착각했던 거지.



자신들 나름대로의 치열한 세계를 살아가고 있을 아이들에게 ‘넌 좋겠다.’며 속 모르는 소리나 툭툭 내뱉었던 게 아닌지 반성하게 된다. 나 또한 지금도 선이자 지아이며 보라인 주제에 말이다.






번외: 여왕벌의 관점에서

'우리들'은 워낙 수작이라고 소문이 자자해서 우수한 리뷰들도 많을 테니, 착하고 막 그런 거 말고(?) 그냥 좀 다른 시선에서 생각해보기로 한다.


'친구들 다 같이 사이좋게 지내야지'


지금 생각해보니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조언도 없는 것 같다. 나 조차도 '내 사람/내 사람이 아닌 사람' 구분해서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하고만 어울리며 살면서 뭘 안다고 그동안 저런 얘길 씨부리고 다녔나 싶다.


사실 여왕벌 보라의 입장에선 집안 환경도 맞고 성적도 어느 정도 되고, 대화가 통하는 친구랑 놀고 싶었을 것이다. 예전에는 선과 보라가 친했음을 선의 엄마의 대사로 확인할 수 있는데, 그렇다면 분명 그 시간의 틈 속에 뭔가 어긋날 일이 있었을 것이고 더 이상 선과 자신은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겠지.


물론 괴롭힘이 포함된 왕따가 옳다는 말은 절대 아니다. 나도 어릴 때 여왕벌 친구 옆에 붙어도 보고, 당해도 보고, 속으로는 나쁜 애라고 생각도 했었으니. 그런데 성인이 된 지금 이 영화를 보니 열두 살 적 여왕벌 친구의 심정도 어느 정도는 이해가 되더란 뜻.



그리고, 보라 또한 어느 시점에서는 선이자 지아였을 것이라는 것이 거의 확실하기에 이 영화는 생각할 거리를 무한대로 던져준다.









그리고 연출에 대하여

주인공 선의 시점에 맞춰 진행되는 우리들은 앵글조차도 선이 바라보는 세상 그대로이다. 초반부에는 어린이들의 시점을 기준으로 앵글을 잡는 줄 알았는데, 중반부가 넘어가면서 지아도 종종 앵글에서 벗어나는 것을 보고 (지아가 선보다 키가 크다) 온전히 선의 시점임을 알게 되었다.




초반에는 처음 보는 구도여서 뭔가 불편하고 자꾸 화면이 잘린 것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는데, 계속 보다 보니 신기하게도 어느 순간 정말 선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심지어 선이 누워서 식탁에 앉아있는 부모님을 올려다보는 앵글마저 그대로 화면에 담아냈다.)


만약 이 영화가 일반적인 화면 구도로 진행됐더라면 여타 1만 개의 평범한 영화들과 어깨를 나란히 한 채 1만 한 번째 영화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윤가은 감독은 1만개의 영화들을 제치고, '좀 다른' 첫 번째 영화를 뱉어냈다. 거창한 연출론은 잘 모르지만 영화가 전하고자 하는 바를 온전히 관객의 마음에 심어줄 수 있게 하는 모든 방법이 '연출'이라면, 이런 시각에서 윤 감독은 새로운 연출 장르를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영화의 색감이 전체적으로 파스텔톤인데, 이 색감이 활약하는 바가 크다. 영화 파수꾼의 경우 무채색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어서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분위기를 더욱 극대화시켜주는데 반해, 우리들의 파스텔은 채도/명도가 강렬한 화면 톤에서는 받을 수 없는 느낌을 관객에게 전달해 준다. 어린 시절 나의 기억이 아늑하게 천천히 떠오를 수 있도록 도와준다고나 할까.

 

영화 초반부의 탁월함을 설명하기 위해 19금 영화보다도 무섭다는 표현을 사용했지만, 사실 ‘우리들’은 아이들의 세계를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다소 서툰 그들을 도닥여주는 영화라는 것을 이 색감 톤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












그래서, 해결이 필요한 일인가?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본의 아니게 관객들의 대화 몇 개를 듣게 되었다.


어른 관객 1

"선생님이 보라, 쟤 하나 잡지를 못하네."

어린이 관객 1

"엄마, (선이 다시 지아 편을 든다고 해서) 저런다고 해결 안돼~"


글쎄, 난 잘 모르겠다. 해결이 필요한 일인가?

선과 지아가 화해하고 둘이 사이좋게 지내고, 여왕벌 패거리랑도 잘 지내고, 해필리 에버 애프터? 노웨이다.


앞서도 말했지만 모든 친구가 사이좋게 지낸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다고 저들만의 세계에 누가 뛰어들어가 인위적으로 조정하는 것 또한 다른 부작용만 낳을 뿐이겠지. 우리는 그저 그들이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지 지켜보다가 가끔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는 아이가 있을 때 무릎에 흙이나 툭툭 털어주는 존재여야하지 않을까.


그냥 그렇게 세상을 배우고 친구를 배우게 두어야, 벽에 부딪히고 경험하도록 해야, 자신의 세계를 세우고 성장할 수 있는 것이라고 믿고 싶다.


자꾸 뭔가를 해결하려고 하고, 되돌리려고 하고, 존재하지도 않는 파란 나라를 만들려고 하면

도대체 '언제 놀아?'






(+) 배우들의 연기가 발군일뿐더러,

너무... 귀엽다.....(오열하며 야광봉을 흔듦)

숨겨진 주인공 강스타찡



(++) 파수꾼의 초딩 버전을 본 듯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어서 얼굴에 미소가 만연한 채로 n번째 파수꾼 정주행을 시작한다. 파수꾼 짱(?




(+++) 10/7 금요일 추가

윤감독님, 25회 부일영화상 신인감독상 수상 정말 정말 축하드립니다. 짝짝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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