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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줄리 Jul 11. 2016

파수꾼이라는 영화의 예민함에 대하여

아이들의 세상, 어른들의 세상, 그리고 우리들의 세상

파수꾼이라는 영화의 예민함에 대하여

그동안의 청춘들, 적어도 영화라는 매체에서 그려내는 그들은 대개 이유 모를 정체성의 혼란을 겪고 불안한 미래를 그리며 방황하곤 했다. 딱히 원인은 모르지만 그냥 그렇게, ‘덤벼라 세상아’ 소리 질러 왔고 관객들도 ‘그래 10대 땐 다 저런 거지. 나도 저랬어.(끄덕끄덕)’ 거리며 심적으로 동조했다. (내 기억 속 이런 영화의 시초는 무려 젝키의 ‘세븐틴’인데 그 당시 10대였던 나조차 쟤네가 왜 저러는지 이해 못할 정도였다고 이제와 회고한다. 그때는 이런 말 못했다. 우리 반에 젝키 팬이 너무 많아서.)


반란...그 이름... (출처: 구글 이미지 검색)


혹은 한 인간이 아닌 ‘10대들’이라는 카테고리에 아이들을 전부 집어넣고 그들의 단편적인 한 부분만 부각하여 서로 부딪히며 갈등하다가 ‘결국 화해하고 사이좋게 행복하게 살았답니다’류의 영화가 거의 전부였다고 확신한다. 예를 들어, 전교 일등과 싸움 일짱의 서론(서로 이해하지 못하고 부딪힘) – 본론(소소한 에피소드를 통해 잘 지내는가 싶더니 최대의 위기 봉착 ex. 오해) – 결론(이제 너를 이해해. 사실 너도 나랑 비슷했어. 화해하자. 이후 영원한 행복)의 플롯 같은 것 말이다.


10대라고 해서 로봇이 아닐진대, 게다가 남자애들이라고 해서 한 가지 생각과 특징과 성격만 가진 게 아닐 텐데, 그들은 반항하는 종잇장이거나 공부 잘하는 종잇장 이어왔다. 물론 나도 파수꾼을 보기 전까지는 그냥 청소년 영화는 다 ‘트레인스포팅’ 같은 줄 알았고 그게 소위 간지 나는 청춘물이라고 생각했었다.


소위 간지나는 청춘물. (출처: 구글 이미지 검색)


이 정도의 안일함을 가지고 스크린에서 파수꾼을 처음 접했을 때의 충격은 맨 오브 스틸이 사실은 철학 영화였음을 그만 영화관 안에서 깨달아버린 경험과 가히 맞먹는 것이었다. 인간의 선입견과 좁은 시각이란 얼마나 자신의 우주를 자기 스스로 좁히는 짓이며 또한 반대로 얼마나 극적으로 더 큰 우주를 마주 보게 하는 신성한 도구인지.



파수꾼은 예민하다. 대충 지나가는 법 없이 주요 인물들의 감정선을 세세히, 그것도 과하게 짚어주기 때문에 저들도 느끼고, 생각하고, 고뇌하고, 말하는 ‘인간’이라는 것을 온전히 느낄 수 있다. 이 영화에는 ‘싸움 일짱’도 없고 ‘전교 일등’도 없다. 그냥 내 옆자리에 있는 좀 웃기고 싸움 잘하는 친구 한 명, 옆 반에 있는 우리 동네 사는 애 한 명쯤이 있을 뿐. 즉, 영화라는 매체의 입장에서 전혀 매력적이지 않은 존재, 누구나 될 수 있는 ‘그저 그런 우리’를 극에 끌어와서 이렇다 할 큰 갈등 없이 친구들 간에 미세한 틈이 벌어지는 과정을 그 어떤 영화보다도 더 극적으로 연출해냈다는 것이 이 영화의 상대적이자 절대적 장점이고 앞으로도 쉽게 깨어지지 않을 ‘독자적 위치’의 이유이다.


그동안의 영화들이 광각의 렌즈로 학교 건물 전체 혹은 복도 전체를 하늘에서 조망해왔다면, 파수꾼은 현미경으로 교실 책상 위 귀퉁이에 거의 지워진 낙서 한 글자 한 글자를 확인하려는 움직임을 보인다. 이런 맥락에서, 주요 씬에서 인물의 얼굴 위주로 zoom 하는 앵글이 유독 많은데, 이는 매우 효과적으로 관객들을 그 상황으로 몰아넣는다. (물론 젊은 배우들의 호연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몰입감이다.) 분명 이러한 몰입감은 ‘싸움만 하는 애’와 ‘공부 잘하는 애’로 대표되는 지극히 단순한 ‘로봇 서사’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밀도이고, 이 고밀도의 긴박감과 상황별 공감 유도는 역시 평범한 우리 주변을 샅샅이 살피는 파수꾼만의 ‘예민함’에서 기인한다고 밖에 볼 수 없다.



숨도 제대로 못 쉬고 집중한 장면 (출처: 또 구글 이미지 검색)




기태 역의 이제훈의 연기를 빼놓고 파수꾼을 논할 수 있을까

파수꾼의 사실상 주인공은 ‘기태’라고 할 수 있다. 이 영화에서 가장 입체적인 인물인데, 그 이유는 단순히 말하자면 ‘한 줄로 요약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기태는 싸움 일짱까지는 아닌데, 좀 잘하기는 하고 또 그렇다고 공부 잘하는 애는 아닌데 학업을 포기한 친구는 아니다. 애들 사이에서 적당히 재밌는 이미지로 통하고 대화를 주도할 줄도 안다. 그리고 친구의 범주도 다양하고 여자애들이랑 노는 것도 좋아한다. 한부모 가정에서 자랐지만 이를 비관하여 땅을 파고 들어가는 스타일도, 그렇다고 세상을 밝기만 한 눈으로 바라보지도 않는다. 한 반에서 반드시 한 두 명은 있을 법한 친구지만 배우 입장에서는 연기하기 이렇게 어려운 인물이 또 있을까?


한 가지 기조 (ex. 덤벼라 망할 세상아)만 가지고 그 방향성만 생각하며 연기하기는 어렵지 않다. 계속 최대치로 그 방향으로 달려가면 될 테니까. 하지만 기태 같은 인물은 기본적인 에너지를 평균으로 깔고 가다가 본인 신상의 변화, 친구 사이의 작은 틈, 나와 쟤 사이의 미묘한 움직임이 포착될 때마다 조금씩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야 하고 (예를 들어, 오르락내리락 거리는 시계열 기준 막대그래프 같은) 심지어는 이런 틈들의 축적으로 인해 에너지가 엇나가게 폭발할 때 관객으로 하여금 이해까지 시켜야 한다. 근데 이 어려운 걸 이제훈이라는 배우가 해낸다. 감독의 디렉팅이 어디까지였는지는 가늠할 수 없으나, 감독의 의도를 충분히 이해하고 이에 입체적인 요소를 덧붙여 기태를 완벽히 표현했다는 것만큼은 확신할 수 있다.


이제훈의 연기에 감탄을 자아냈던 장면 중 하나를 꼽자면, 단연 ‘자기고백’ 씬이라 할 수 있겠다. 조금씩 자기를 의심하기 시작하는, 하루아침에 나를 낯설게 대하는 친구 앞에서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자신의 치부, 어머니의 부재를 고백하는 그의 연기는 억지 감동을 자아내도록 지나치게 극적이지도 않고 그렇다고 무미건조하지도 않다. 그저 하굣길 집 앞 골목에서, 아직은 어린 10대 소년이 ‘존나 쪽팔리지만’그래도 할 말은 해야겠어서, 한 자 한 자 씹어 내뱉는 그 모습 그대로를 표현할 뿐이다. 사실 그렇게까지 정석으로 비밀 얘기를 한다는 것 자체가 굉장히 어려운 일임을 우리 모두 알기에, 겉모습은 거칠지만 속은 아직 아이인 기태를, 친구들 중에서 가장 순수한 아이는 의외로 기태임을 표현한 장면이라는 생각도 든다.


존나 쪽팔리지만 할 말은 해야겠는 얼굴 그 자체 (출처: 또..)



아이들의 세상, 어른들의 세상, 우리들의 세상

결론적으로 파수꾼은 성장영화의 탈을 쓴 너, 나, 우리에 대한 영화이다. 누구나 기태와 베키, 동윤일 수 있고 실제로 우린 그들 중 하나일 것이다. 지금 우리가 10대를 벗어난 어른이라고 해서 친구들 사이, 인간관계 사이에 벌어지고 있는 작은 틈을 노련하게 포착해서 발생 가능한 안 좋은 경우의 수를 전부 없애며 완벽한 삶을 살고 있지도 않고 실제로 그럴 수도 없다. 다만, 성인이 된 후 겪은 다양한 경험들과 사회적 위치, 개인의 철학이 10대의 맨 얼굴에 조금씩 덮어져 그들처럼 행동하지만 않을 뿐이다.


가끔은, 기태가 이 세상 사람들 누구나 다 똑같이 흔들리며 살아간다는 걸 미리 알고서, 그 시기를 어떻게든 견뎌주어 지금 나와 같은 나이의 성인이 되었기를 바라기도 한다. 예전의 자기와 같은 고민을 하고 있는 또 다른 기태에게 한 마디쯤 툭 던질 줄 아는 멋진 어른이 되어 있을 것만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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