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 주의: 스포 투성이입니다…
요새는 영화 포스터들을 정말 예쁘게도 잘 만든다. 예전(이라 함은 ‘접속’ 시대 정도를 일컬음)에는 초고속 인터넷이 없었던 시절이니(그런 때가 있었답니다..) 포스터나 팸플릿이 영화의 정보를 알리고/제공받을 거의 유일한 창구였다. 그러니깐 이게 어떤 영화인지 한눈에, 적어도 두 눈에는 알려줘야 하기에 얼마나 유명한 영화배우가 나오는지 딱! 누가 봐도 한석규! 인 배우 얼굴을 큼지막하게 넣고 설명도 덧붙여야 했다. 그래서 우리는 접속을 보기도 전에 한석규의 채팅 아이디를 알아버렸다. ID 해피엔드님이 입장하셨습니다. (아앜)
그때를 생각하면 오늘날의 영화 포스터들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포스터 제작사의 작품들을 보고 있노라면 마치 전시회에 온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곤 한다. 심지어 어떤 영화는 영화 보다 포스터가 더 좋아서 소장하고 있는 경우도 있다. 가만 생각해보면 요새는 오히려 포스터에서 모든 것을 보여주면 추가 정보를 찾을 필요가 없어서 바이럴이 어렵기 때문에, 홍보물을 더 은유적으로 제작하는 경향도 있는 것 같다. 잠재적 관람객들의 호기심 자극을 통해 5초 만에 포털에 접속하여 영화 제목을 검색하게 하는, 기괴하리만치 빠른 세상이기에 가능한 새로운 트렌드.
어쨌든 아무리 ‘은유적’이 대세라고 해도 검색해볼 마음이 들게 하려면 적어도 좀 ‘예뻐야’ 하는데 친절하지도 않고 심지어 ‘예쁘지도 않은’ 포스터 하나를 마주하게 되었다. 흑인 한 명이 나를 바라보고 있는 영화 ‘문라이트’의 포스터였다. 처음 봤을 때는 그저 ‘당혹스러움’ 혹은 ‘이상하다’의 느낌만 있었을 뿐으로, 호불호를 굳이 나누자면 ‘불호’였다고 말할 수 있겠다. 영화를 관람한 지금은 샤이론의 눈을 바라보자니 내 마음이 아려서 잘 못 보겠지만. (참, 사람이란 이렇게도 편협하고 간사하며 한 치 앞도 못 본 채 살아가는 존재다.)
이 한 장의 ‘이상한’ 포스터에서 출발한 호기심이, 1년 중 가장 바쁜 시기를 전쟁처럼 보내고 있는 이 땅의 직장인(=나)을, 꿀같은 수면시간을 줄이면서까지 PC 앞에 붙들어 앉혀놓고, 이 작품이 얼마나 예쁜 영화인지 주절주절 늘어놓게 만들고 있다. 이건 정말.. 그 어떤 사람도, 소지섭이 아니라 소지섭 할아버지가 와도 (많이 좋아함), 억지로는 시킬 수 없는 일로써, 현시점 기준 오직 ‘문라이트’만이 내게 할 수 있는 마법 같은 일이다.
‘진짜’ 사람들의 이야기, 그리고 ‘나’의 이야기
문라이트는 불우한 흑인 소년의 ‘진짜’ 그리고, ‘사랑’ 이야기를 풀어내는 영화다. 영화는 주인공 ‘샤이론’의 이야기를 초딩, 고딩, 20대 중후반 정도의 3개의 챕터로 나눠서 보여주는데, 알고 보니 내가 본 그 ‘이상한’ 포스터는 이 3명의 얼굴이 합쳐진 하나의 얼굴이었다. (우리는 모두 같은 ‘눈’을 가지고 있지만 각자가 대상을 바라보는 애정의 정도에 따라 이렇게 큰 차이가 발생하기도 한다. ‘본다’고 해서 모두 ‘보고 있는 것’은 아닌 것이다.)
아가 샤이론, 일명 ‘블랙’은 소심하고 내성적이라 친구들에게 곧잘 놀림을 당하는 아이로, 성 정체성에 혼란을 겪는 와중에 ‘감정적’ 아빠의 존재인 마약상 ‘후안’을 만나게 된다. 블랙은 후안을 통해 어렴풋하게나마 ‘나’라는 존재를 생각해보게 됐을 것이고, 달빛 아래 비치는 자신의 살결이 ‘이상한’ 게 아니라 ‘특별할’ 수도 있다는 걸 깨닫는다. 이 어린아이에게 ‘후안’이라는 단 하나의 창문이 계속 열려 있었다면, 그의 인생은 분명 다르게 흘러갔을 것이지만 후안은 어느 날 거짓말처럼 사라졌고 블랙은 제2장의 ‘샤이론’이 된다.
영화 속에서 더 이상 후안이 아이의 곁에 남아있지 않다는 걸 알게 된 순간의 쓰라림이 아직도 가슴 한쪽에 남아 지워지지 않는다. 태어나보니 흑인이고, 빈민가 출신이며, 아빠는 없고, 하나뿐인 엄마는 마약중독자일 뿐만 아니라 친구라고는 하나 있는 녀석이 자꾸 눈에 밟히는 내성적인 10대 아이를 상상해보시라. 설상가상으로 키다리 아저씨까지 떠나버린 아이를. 거기에 사춘기까지 겪으면서 그 몇 년의 혼란스러운 시간을 견뎌냈을 2막의 샤이론을 바라보는 관객의 마음을.
나는 사춘기 하나만으로도 온 세상이 다 나를 공격하는 것 같고 마음이 괴로워 제임스 딘 코스프레를 하며 부모님 속을 썩였는데. 저 모든 걸 견뎌냈어야 하는 흑인 빈민가 구석에서 숨죽여 살아가는 소년의 심상을, 내 깜냥으로는 상상하기 조차 어려워서 감히 울기도 미안했다. 그리고 그 미안했던 마음이, 며칠이 지난 지금 영문모를 따뜻함으로 내게 되돌아왔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위안. 아직도 내가 왜 그를 보면서 마음에 위안을 받았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 뜻과 이유를 찾아가는 게 이 영화를 보고 나온 관객에게 주어진 숙제라는 생각을 해본다.
그럼, 이쯤에서 한 번 생각해보자. 이 영화가 과연 ‘흑인 영화’인지에 대해서.
문라이트에는 흑인이 아닌 인종은 등장하지 않는다. 그래서 처음엔 조금 ‘이상’했다. 적어도 백인이 한 명은 나와야 무시를 당하거나 비교를 당해서 영화적 드라마가 완성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샤이론의 학교에서 목소리만 나오던 선생님이 카메라에 비쳤을 때부터 내 이런 나이브한 예측이 보기 좋게 빗나갔다는 걸 깨달았다. 무의식 중에 선생님은 백인일 거라고 추측했던 내 안의 고정관념에 나 자신도 놀랐고, 그때서야 알 수 있었다. 흑인, 그리고 빈민은 ‘주류’의 삶에서 아예 철저히 배제되어 살아간다는 것을. 그 둘이 섞여서 살아가며 갈등을 일으킨다는 설정 자체가 너무 순진한 발상인 것으로, 그건 ‘가짜’였다.
이 영화의 ‘진짜’는, 소수자들은 주류에게서 아예 지워지고(=고려대상이 아니고), 마약에도 너무 쉽게 노출되는 환경에서 자라나며, 심지어 그들 사이에서도 아무런 의미 없는 주도권 싸움이 지리하게 벌어진다는 것. 그리고 그 과정에서 각자의 인생은 너무도 쉽게 바스러질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 세상을 살면서 매 순간 항상 ‘주류’로 살아가는 사람은 없다. 원래 잘 단정 짓지 않는 성격이지만 이번에는 정말 단호하게 말할 수 있다. 아무리 ‘갑’처럼 보이는 사람도 찰나의 순간에는 ‘을’이 되고 ‘정’까지 내려가는 일도 부지기수이다. 원래 ‘을’인 사람은 더 이상 말할 것도 없을 터다. 문라이트는 그런 순간순간을 살아 내는 우리 모두에게 조용하고 담담하게 위로와 격려를 살며시 선사해주고 떠나는 달빛 같은 영화다. 덧붙여서, ‘흑인 영화’라는 건 이 세상에 없다.
이 얼마 만에 찾아온, 가슴 떨리는 ‘순정’인가
샤이론은 자신이 좋아하는 (그리고 마음이 통했다고 생각했던) 친구 케빈에게 배신 아닌 배신을 당하고 변하기로 마음먹는다. ‘예전의 내가 아니야.’라고 외치며. 바로 이 시점부터 샤이론은 진짜 ‘나’는 버리고 새로운 ‘내’가 되기로 마음먹는데 이 지점의 (덕후)'킬링 포인트'는 그 트리거가, 같잖게 놀려대던 양아치들이 아니라 [사랑에게 받은 상처]라는 것이다. 나쁜 녀석들에게 매일 괴롭힘 당하는 샤이론이지만 그들은 샤이론의 내면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했고, 오히려 샤이론을 움직인 건 인생 단 하나의 사랑 케빈이라는 사실. 이 순간부터 이 영화가 엄청난 러브스토리를 뱉어낼 것이라는 덕후만의 직감이 왔고 그 예상은 적중하고야 말았다!
그 일이 있고 약 10년 뒤, 제3장의 샤이론은 어마 무시한 인상의 ‘B’로 돌아온다. 자신의 키다리 아저씨 인 후안의 모습이 되어. 마치 24시간 ‘난 강해. 예전의 나는 몰라. 나는 강해. 개 쎄.’라고 중얼거리는 듯한 그의 일상에, '샤이론’으로의 회귀를 알리는 벨소리가 울려퍼진다. 나에게는 그 벨소리가 상투스처럼 들렸고 샤이론에게도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모두가 예상할 수 있듯이, 전화기에서는 케빈의 목소리가 들려왔고 갑자기 툭 내뱉어진 사과의 말은, 어울리지 않는 갑옷 같은 근육을 둘러매고 있는 샤이론의 껍질을 툭하고 깨트려주었다. 10년 전의 상처로 인해 자기 자신을 죽이고 다른 사람이 되어 살아가고 있는 그의 가면을, 또다시 그 사랑이 나타나 벗겨준 것이다.
떨리는 마음을 애써 진정시키며 케빈의 식당으로 향하는 샤이론의 뒷모습부터 둘의 조금은 어색한 해후, 그리고 케빈의 집까지 차로 데려다주면서 나누는 둘의 대화에 이르기까지 영화 후반부 이들의 사랑에 전력을 다하는 아주 성실한 드라마적 서사를 바라보며 내가 느꼈던 긴장과 떨림, 짜릿함을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보물을 발견한 기분이라고 하면, 설명이 될는지 모르겠다.
웬만한 이성애 로맨스에서도 잘 느낄 수 없었던 풋풋함과 둘 사이에서만 공존하는듯 보이는 충만한 행복감은, 아마도 그 때까지 성실하게 쌓아온 이 영화의 탄탄한 이야기와 더불어 샤이론의 가슴 절절한 ‘순정’ 그것 하나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마지막 순간, 케빈을 정직한 눈으로 바라보며 ‘B’에서 ‘샤이론’으로 돌아온 그의 묵직한 고백에는 정말 두 손 두 발 다 들 수밖에 없었다.
날 만져준 사람은 너뿐이야. 너 하나 뿐이야. 그 이후로 누구도 없었어.
어쩌면 세간에서 떠들어대는 ‘진짜 남자’는 어울리지도 않는 근육이나 터프함으로 포장된 무례함이 아니라, 바로 이런 거 아닐까. 상대의 눈을 보고 솔직하게 자신의 사랑을 고백할 줄 아는 남자. 그건, 자기 사랑에 자신이 없으면 절대 할 수 없는 일이다.
이 영화만이 해낼 수 있는 연출
밤의 해변이다. 잔잔한 파도가 친다. 썸을 타는 듯 보이는 두 명이 앉아있다. 이때 떠오르는 그림은? 정답! 등 뒤에서 바다를 바라보는 앵글로 둘의 미묘한 기류를 한껏 표현한다! 딩동댕! 혹은 사선에서 인물들을 조망하며 파도치는 바다와 함께 멋들어진 그림을 만든다! 그것도 딩동댕! … 하지만 이 영화에서는 저런 연출이 정답이 아니다. 감독은 바다보다도, 달빛보다도 둘의 얼굴 그 자체에 초점을 맞춘다. 바다는 그저 청각적으로 느낄 수 있게 해줄 뿐이다. (참, 이 영화는 음악을 포함한 청각을 자극하는 모든 요소를 다른 영화보다 훨씬 더 예민하고 세심하게 다룬다. 그래서 어떤 작가가 그렇게 말했나 보다. 라라랜드와 문라이트를 극장에서 보지 않을 거라면 그냥 안 보는 편이 낫다고.)
단순히 눈에 보이는 장면이 아니라, 기저에 깔린 둘(물론 샤이론과 케빈) 사이의 미묘한 기류를 바탕으로 한 이 장면의 연출은, 흑인이라는 인종의 살결이 저렇게 아름다웠나 하는 감탄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잔잔한 파도 소리와 함께 달빛을 오롯이 받아내 약간의 ‘블루’로 표현되는 둘의 얼굴색과, 진주 같은 반짝거림과, 새로운 앵글은 어느 영상작품에서도 본 적 없는 신선함과 청명함을 느끼게 해주었더랬다. 저 장면의 색감과 공기를 한 번 더 느끼고 싶어서 영화를 다시 보고 싶을 정도로.
문라이트를 관람하기 전에는 흑인 영화라고 생각했고, 영화를 보고 있자니 그저 사람 이야기구나 싶었고, 영화가 끝난 후 몇 번을 곱씹어 보니 이건 또 엄청난 러브스토리였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는 시구처럼, 각 챕터의 제목인 ‘블랙’, ‘샤이론’, ‘B’를 불러준 건 후안도, 엄마도 아닌 케빈이었다. 가짜인 채로 살다가, 나를 알아봐 준 단 한 명의 사랑에게 미련 없이 달려가서 꽃이 되어 고백해낼 수 있는 그 용기에 매료되어 나는 아직도 이 영화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다.
음, 다소 닭살스럽지만 이번 글은 꼭 아래 시구절을 빌려 끝맺고 싶다.
꽃, 김춘수.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빛이 되고 싶다.
오, 사랑!
Ps. 샤이론은 아마도 케빈을 다시 만난 후 마약상을 그만두었을 것이다. 왜냐면 마약상을 하며 먹고살았던 사람은 ‘B’ 이지 샤이론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아마도 마약상을 계속했다면 샤이론도 후안처럼 비극적인 최후를 맞게 되었을 것이 거의 분명한데, 이를 막아준 것 또한 결과적으로 케빈이라는 사실이 이 영화가 얼마나 이 둘의 관계과 인생에 대해 집중하여 제대로 만들고자 한 작품인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야! 광! 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