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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줄리 Mar 11. 2020

윤희에게, 나의 외로운 윤희에게.

그리고 자기 자신을 찾아낸 윤희에게.



누구나 한 번쯤은 그런 기억있을 것 같다.

사랑하는 혹은 사랑했던 사람에게 부치지 못한 편지의 기억.



꼭 편지가 아니어도, 생각만 해도 눈물이 날 것 같은 '그대'에게 전하지 못한 내 마음속에 써 내려간 몇 마디 같은 것들. 그 몇 마디를 끝까지 전하지 못한 기억이 있는 사람으로서, '윤희에게'의 마지막 상영을 기어코 사수하고야 만 것은, 나는 못했지만 스크린 속의 누군가는 그걸 이루어내는 걸 보고 싶어서였을까. 아니면 전해지지 못했어도 괜찮다는 위로를 받으러 간 걸까.



아직 그 답은 내리지 못했지만, 상대를 외롭게 만드는 '윤희'가 정작 얼마나 외로운 사람인지 그 지독한 외로움이 어떤 건지 꼭 전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의 '외로움'이 너무 쉽게 잊혀지지 않게.













윤희의 담배, 나의 할머니의 담배.

한동안 글쓰기를 완전히 멈췄던 나에게 다시 글을 쓰고 싶은 강한 동력이 되었던 건 아름다운 김희애 배우의 외모도 아니었고 (물론, 담배를 쥔 손가락마저 아름다우셨습니다만) 아주 예전에 여행한 기억이 있는 오타루의 멋진 설경도, 아이돌로 알고 있던 배우 김소혜의 새로운 가능성도 아니었다.




그건 바로 담배였다. 윤희의 '담배'. 그 한 개비.




윤희와 쥰은 2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말 그대로 '얼어붙은' 사랑을 간직해온 중년 여성들이다. 둘 모두에게 상처였던 어린 날의 사랑은 그들의 성장을 멈춰버리는 억제제가 되었고 윤희는 쥰이 떠난 시점부터 자기 자신을 잃어버린다. 아마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여린 윤희가 독한 담배를 쥐어 문 것은.


배우의 눈빛과 표정 혹은 답답할 만큼 지난한 영화의 분위기 만으로 등장인물의 현재와 전사를 파악해야만 하는 영화인 탓에, 아무것도 명확하진 않지만 이것 하나만큼은 확신할 수 있다. 자신의 소중한 무언가를 잃어본 사람이 평생 입에 댈 생각도 하지 않던 것을 제 손으로 입가로 가져간 사람을 나는 본 적이 있으니까.




나의 할머니는 눈이 펑펑 오던 어느 지독하게 추운 겨울날, 소중한 존재를 잃었다. 하필이면 이 영화의 배경인 끝도 없이 눈이 오는 바로 그 설국처럼. 그 예쁜 눈 덕에 그녀는 담배의 맛을 알았다고 했다. 어린 시절 아파트 베란다 한 켠에서 쓸쓸한 눈으로 담배를 피우던 내 할머니의 모습과 표정 없는 얼굴로 담배에 불을 붙이던 윤희는 분명 어딘가 닮아있었다. 이제 다시는 만날 수 없어서 당신에게 담배 맛은 어떤 건지 물을 수도 없는 내 할머니를 대신해 스크린에 나타난 윤희를 보며 이제야 어렴풋이 알 것도 같았다.



나 자신보다 사랑하는 것을 잃었을 때의 공허함과 그 구멍을 메울 것은 매운 연기뿐이었던 그녀들의 외로움을.



윤희의 전남편인 인호는 윤희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사람을 외롭게 만드는 사람'이라고.

... 타인을 평생 외롭게 만들려면 정작 본인의 외로움은 얼마나 시커멓고 매웠던 걸까?












진짜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갈 준비를 하는 윤희에게

윤희의 인생은 쥰이 떠나던 그 순간 일시정지(II) 했을 것이다. 영화 후반부 쥰과 재회하기 직전까지 그녀는 다른 사람의 인생을 살았다. 가족이 하라는 대로 쥰과 헤어졌고, 가족이 원하는 대로 대학공부를 하지 못했다. 그리고는 오빠가 소개해주는 사람을 만나 결혼했고, 또다시 오빠가 소개해준 직장들을 전전했다. 이 20여 년간의 그녀의 발자취에는 '윤희'는 없고, '집안의 딸', '여동생', '집사람', '엄마'만 가득하다. 이렇게 '나'는 포기한 채 '역할'만 전전하며 살아오던 윤희의 삶에 툭, 하고 던져진 편지. 그 편지는 쥰으로부터 도착한 러브레터라기보다는 윤희 자신에게로의 초대장이 되었다. 인생을 통틀어 단 하나의 사랑으로부터 받은 구조신호. 정말 도저히 '문라이트'를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는 지점이다.








영화 '문라이트'의 B는 케빈의 전화 한 통에 순식간에 무장해제되어 그 시절의 '샤이론'이 된다. 그에게 씻지 못할 상처를 준 사람 또한 케빈이었지만. '윤희에게' 속 윤희도 쥰의 편지 한 장에 20년 전의 자신을 소환한다. 서서히 삶에서 기대라는 걸 하게 되고 설레는 감정이 눈동자에 어리기 시작한다. 마치 인형에 생명을 불어넣은 것처럼. 그런데 윤희를 껍데기로 만든 사람 또한 쥰이었다는 점이 정말... 아, 이 영화적으로 완벽한 순간들을 어쩌란 말이냐...(트위스트...)






쥰과 재회한 후 윤희는 어떤 다짐을 한 것으로 보인다. 본인이 의도한 것이든 무의식 중에 하나씩 실행한 것이든 그건 중요치 않다. 중요한 건, 윤희가 일시 정지되어 갇혀있던 지난 세월과 이루지 못한 첫사랑을 드디어 마주하게 되었다는 것이고 이를 통해 아주 길고 길었던 그녀 인생의 1막이 비로소 마무리되었다는 것. 그리고 이제 다음으로 한 발짝씩 뻗을 수 있는 용기를 얻었다는 것(▷).



윤희는 이제 오빠가 소개해준 사람과 더 이상 억지로 마주하지 않고, 오빠가 소개해준 직장에 다니지 않으며, 가족들이 있는 지역에 머물지 않는다. 윤희는 자신의 딸과 사는 것을 선택했고, 자신의 직장을 선택했으며, 쥰에게 부칠 편지를 선택했다. (흑흑)










윤희와 쥰이 이후 어떻게 됐을지는 우리 각자의 마음속에 소중히 남기기로 하고, 단 하나 윤희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이제 담배 좀 대놓고 사람들 앞에서 피웠으면 좋겠다는 거. 그게 뭐든 윤희 자신의 선택이니까. 더 이상 누가 시킨 게 아니라, 당신 인생이니까.



 

영화의 마지막 부분, 때마침 길고 긴 겨울이 끝나고 새로운 봄이 시작된다. 윤희의 새로운 챕터가 시작됨을 알리듯이 말이다.



아, 그래서 '새봄이'였나..



행보캐...유니,새봄...






ps.

'추신. 나도 네 꿈을 꿔.'와 함께 상영관이 암전 되는 순간 내 심장도 쿵, 하고 내려앉았다.

이 아름다운 사랑이야기를 보고 혹시 윤희의 성장기인 걸까 라고 잠시 생각했던 나를 매우 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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