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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수일수록, 사람들을 부지런히 만나야!

퇴사는 인간관계를 정리하는 아주 좋은 기회

"365일 힘들어요. 고해는 인생의 디폴트예요. 그런데 행복도 365일 생겨요. 불행만 있거나, 행복만 있는 삶은 없죠. 핵심은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사랑하는 거죠. 그게 행복이에요.

남에게 일어나는 일은 나에게도 생길 수 있습니다. 나에게 생기는 일은 남에게도 생길 수 있고요. 나만 겪는 일은 없어요. 다 누구에게나 어떤 일이든 생깁니다.

저는 힘든 일은 있지만, 나쁜 일은 없다고 생각해요. 어떤 힘든 일이 생겨도, 그게 꼭 나쁘지만은 않아요. 배울 점도 생기고, 나를 힘들게 했던 일 때문에 또 다른 기회도 생기더라고요. 하나의 문이 닫히면 그 때야 또 다른 문이 열리는 거죠.

저는 모든 일을 볼 때 비관적으로 전망합니다. 하지만 어떤 일에 대해서든, 태도만큼은 긍정적으로 가지려고 해요."


15년 하던 일을 마치고 나서, 몇 분께 연말인사 겸 감사편지를 썼었다. 그중 한 분, 박대표님은 나중에 꼭 한 번 직접 보자며 인사하러 오라고 했다. 워낙 바쁘신 분이라 2월이 되어서야 약속 잡아 인사드릴 수 있었다.

보통 퇴사 인사드리러 가면 "왜 그만뒀어요? 거기 무슨 일 있었어요? 무슨 힘든 일 있었어요" 그런 캐묻는 질문부터 받았었는데, 박대표 님은 "거기 몇 년이나 있었죠? 그래요, 오래 있었군요." 그걸로 끝.

15년 넘게 아는 사이였지만, 일 관련한 내용 아닌, 취미, 버킷리스트, 직업관, 인생관 같은 사적인 이야기를 나눈 것은 처음이었다.


"그래서 무엇을 하고 싶어요? 갈 수 있는 분야는 다양할 텐데."

"다음에는 기업에서 일해보고 싶지만, 지금 당장은 하고 싶은 게 없어요. 그냥 좀 쉬고 싶어요. 제빵도 배우고, 그냥 평소 생각하지도 않았던 뭔가 새로운 거 배우고, 일 생각하지 않고 좀 쉬고 싶어요."

"그래요, 잘 쉬고 알려줘요. 나중에 좋은 사람들 소개해줄 테니, 같이 만납시다."


그냥 이렇게 쿨하게 받아들여주고, 가르치려 하지 않는 것이 '좋은 어른'의 태도가 아닐까. 문득, 이런 좋은 인생 선배, 어른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퇴사 전후로 가장 많은 변화가 있는 것은 인간관계, 그리고 그 인간관계에 대한 나의 마음이다. 일할 때는 아, 좋은 게 좋은 거지, 내가 먼저 잘하면 상대도 진심 알아주겠지 좋게좋게 생각했지만 힘든 일 있어보니 주변 사람들이 한꺼번에 정리가 된다.


1. 힘든 순간 내가 눈물 보이며 속 터놓고 얘기할 수 있는 사람. 내 편 들어주고 어떻게든 도움 주려는 사람. 밥 같이 먹자, 커피 한 잔 해요, 전시회라도 같이 가요. 그렇게 따뜻한 마음 보여준 사람.

'시간의 검증'을 거쳐 굳게 신뢰할 수 있게 된 사람.

나의 인생진로에 대해 도움 주려고 애쓰는 사람.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방법을 찾아주려고 노력하는 사람.


2. 나서서 적극 도움 주지는 않았지만, 나에 대해 좋게 평가해 주고 관심과 연민을 보여주는 사람.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나를 변호하고 응원해주고 있었던 사람.


3. 내 편인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아니었던 사람. 앞에서는 나 위로해 줬는데, 알고 보니 내가 힘든 상황을 좀 즐기면서 보고 있었구나 싶은 사람, 자신에게 무슨 기회가 올까 호시탐탐 보고 있었던 사람. 알고 보니 그냥 방관하고 자기 잇속 챙기고 있었던 사람.


4. 잘 알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평가하는 말을 내뱉는 사람. 남의 이야기 캐고 말 옮기는 거나 좋아하는 사람.


5. 일 때문에 만난 대부분의 인연은, 연락두절.


6. 작정하고 나를 해치려고 하는 사람. 앞뒤 다르고, 자신에게 베푼 호의와 신뢰를 배신하는 사람.


이혼한 후배가 그랬다. 힘든 일 겪으면서 대부분 인간관계가 정리되었다고. 내가 힘든 상황 놓일 때 그 사람들의 본심이 다 나오고, 나에 대한 그들의 진짜 태도가 보인다고. 정말 이 사람이 원래 이런 사람이었나 싶을 정도로 새로운 모습을 보게 되었다 했다.


좋은 게 좋은 거라 생각했는데, 힘든 순간 오니 진짜 좋은 사람들과 그런 척했던 사람들과, 나에게 해가 된 사람들이 확연히 구분되기 시작한다.

가장 친한 선배에게 실망하기도 하고, 가장 믿었던 친구에게 모멸감을 느끼기도 하고. 그런가 하면, 의외의 인물들이 나를 좋게 평가하고 있었구나, 이 관계는 지금부터 새로 시작이구나 싶은 사람도 있다.


의외로, 같이 일했던 팀원이 아니라 다른 팀 분들이 퇴사축하 저녁을 사주셨다. 아이러니한 직장 인간관계라니...



인간관계에 진저리가 날만큼 상처받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퇴사 이후 더 사람들을 많이 만나야 한다.

나름 폭넓은 인간관계 맺으며 살아왔다 생각했지만, 퇴사해서 나와보니 내가 얼마나 좁은 세상에서 조마조마하며 살았는지 다시 보인다.


비즈니스 미팅으로 만났지만 내가 배우고 성장하는 데 좋은 영향을 끼쳤던 분들, 진심으로 배려해 주고 챙겨주셨던 분들에게는 따로 인사드리러 가기도 하고. 친구에게는 위로도 받고, 선배들에게 조언도 받고. 그런 기회를 통해 옥석이 가려지고, 또 새로운 면들을 발견하게 되기도 한다.

그러면서 새로운 정보, 새로운 사람들을 알게 되기도 하고.


한 가지 재밌는 점은, 모두가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조언을 해준다는 것.

행정사인 선배님은 1인 연구소를 만들어서 얼른 사업자 등록을 하라고 하시고,

보좌관인 친구는 내게 뜬금없이 비례대표 얘기를 꺼내고,

방위산업 관련한 일을 하는 선배는 기업에서 기회를 찾아보라고 하고,

해외에 사는 선배는, 외국 잡지에 글을 기고해 보라고 하고.


모두가 자신이 아는, 자신이 경험한 내에서 조언해 주고 도와줄 수 있다.

그러니 사람들을 만나면서, 그 간접경험의 폭을 넓히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기회를 통해 쭉정이 같은 인간관계에 대해서는 마음정리하고, 사금채취하듯 곱게 남은 귀한 이들에게 집중하는 것도 필요하다.  

이것이 사람 보는 눈을 기르는 법이 아닐까, 현명하게 인간관계를 유지하는 방법이 아닐까.


시간의 검증을 거쳐 남은 이들에게 집중한다. 아닌 이들과는 억지로 노력하며 인연 이어가지 않는다.

그리고 새로운 세상으로 나는 나는 나아간다. 새로운 사람들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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