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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6막쯤, 다시 회사 지원서 제출

어떤 땐, 무조건 글을 써야겠다는 기분이 들 때가 있다. 무엇인가 기록을 남겨두어야 한다는 의무감 같은 것. 그러다가 또 어떤 때는 내가 써놓은 모든 글들이 한없이 어리석고 한심해 보여 다 삭제시켜버리고 싶다는 충동도 든다. 글 쓰는 것이 부담스럽고, 자꾸 미루게 되기도 한다. 지난 몇 주는 그랬다.

다시 예전처럼 몸 컨디션도 떨어져서 비염도 재발하고, 골프 배우고 앙금플라워 떡케이크 만들면서 단기간에 손을 혹사했더니 방아쇠수지증후군 증상도 생겼다. 아침마다 기침콧물에 괴롭고, 손가락도 붓고 걸쇠가 걸린 것처럼 삐걱삐걱 제대로 펴지지도 않는다. 명상에 게을러져서일까, 다시 가끔 악몽도 꾸고. 

이렇게 컨디션이 떨어지니 더더욱 그랬다. 이런 나 자신을 기록하는 것이 싫어져버렸다.



그 와중에도, 제빵기능사 실기 시험도 통과하고, 제과기능사 필기시험도 아슬아슬한 점수로 통과하고. 제과기능사 수업과 앙금플라워 떡케이크 수업도 무사히 마쳤다. (출석률 80% 이상으로 마쳤으니 무사히 마친 것은 맞다.)

미싱기 만질 땐 정신집중이 최고조로 잘 되길래 나름 최신모델 미싱기도 구매해서 부라더미싱 소잉 팩토리에 가서 기초 수업도 다시 수강해 보고 이것저것 만들어보기도 하고. 골프 연습도 부지런하게 해 보고, 사이버대 온라인으로 얼렁뚱땅 중간고사도 마치고. 


그리고 드디어, 회사에 지원서를 냈다.

원래는 2월 말 즈음 공고가 나서 2개월 채용 절차를 거치고, 5월이면 입사할 줄 알았다. 하지만 무슨 사정인지, 채용 공고는 4월 말로 미뤄지고, 5월 초가 되어서야 서류 제출하게 되었다. 


 인생 첫 사기업 도전. 그러니까, 마흔 중반 내 인생 처음으로 이전과는 전혀 새로운 환경 속에서 낯선 종류의 일을 해보는 것이다. 일이야, 결국 다 거기서 거기지, 뭐든 금세 배우고 잘할 수 있어 싶다가도 궁금해진다. 정말 이 일 뒤에 내 인생은 다시 어떤 방향으로 흘러가게 될까?


그런 조금은 설레는 마음으로 채용공고 홈페이지에 접속해서 아이디, 비밀번호를 만들고 고등학교 이후 학력, 경력, 자격증, 지난 경력동안 주요 프로젝트들은 무엇이었는지 쓰고.

회사 지원한 동기는 무엇인지, 앞으로 해당 직무 전문가로 성장하기 위해 어떠한 노력을 할 것인지 300자, 공동의 목표 달성을 위해 협업한 경험이 무엇이었는지, 그런 경험을 통해 무엇을 얻었는지 300자, 최근 3년 내 최선의 결과를 도출한 도전은 무엇이었는지 300자, 나의 최고 역량은 무엇인지 200자, 가장 스트레스받거나 싫어하는 상황 200자, 직무와 관련한 경력과 경험에 대한 경력기술서 3,000자. 아, 이것저것 쓸 것들도 많다.




내 인생을 거꾸로 돌려보며, 객관적으로 기술해 보는 게 얼마만인가. 쓰고 나니 뿌듯하기도, 아쉽기도, 행복하기도, 슬프기도 하다. 난 무슨 대단한 신념을 갖고, 혼자 진지해서 그렇게도 열심이었나. 허망하기도 하다. 


마지막 제출 버튼을 누르니, 고등학교 졸업 이후 내 인생을 하나의 그래프로 잘 정리해서 보여준다. 인생은 단 한 번, 이번 생의 반 정도. 나는 이렇게 살았구나, 회사 채용 홈페이지는 친절하게 요약정리해 준다. 
뿌듯하고 성취감 가득한 날들, 그리고 슬프고 아팠던 기억, 행복하고 즐거운 추억, 나를 불안과 충격으로 몰아넣었던 사건들, 내가 만난 좋은 사람들 이름들이 떠올랐다 사라진다. 아쉬운 후회와 미련, 못 이룬 꿈과 사랑, 공식적인 학력경력과 상관없는 것들이 저 빨간 그래프 뒤에, 보이지 않는 곳에 숨겨져 있다. 


이제, 인생의 6막쯤 되려나. 

전혀 다른 세상 속으로 들어가길 준비하는 나. 서류 제출은 그저 1단계일 뿐인데도, 간단치 않았다. 그건 이제 문지방 하나를 막 건넜기 때문이다. 


이젠 안다. 

하나의 문이 닫히면, 그 뒤로 새로운 문이 열리고. 지금 나쁜 일이 꼭 나쁘지만은 않고, 미래에 또 다른 기회가 될 것이라는 것도 안다. 그냥 지금 내가 순간순간 최선을 다하다 보면, 그 시간들이 쌓여 새로운 길로 나를 이끌 것이라는 것도. 

그러니 결론은, 두려워할 것 없다. 잠시 쉬어가는 것도, 새로운 일을 시도하는 것도. 그냥 있는 그대로, 지금 이대로 편안히 받아들이면 될 일! 


남은 시간 동안 즐겁게, 백수생활을 즐겨봐야지! 다시 마음을 가다듬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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