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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 양말의 불안 - 끝이라고 생각했던 날

2부: 공간의 속삭임

한때 나는 세상을 누볐다. 


주인의 발걸음을 따라 수많은 공간을 누비며 살았다. 아침이면 바쁜 지하철역을, 낮에는 반짝이는 사무실을, 저녁이면 활기찬 거리를 달렸다. 도시의 한구석에서 다른 구석까지, 주인의 발과 함께하는 여행은 언제나 새로웠다.

빗방울이 내리는 날이면 촉촉한 공기를 맞으며 달렸고, 햇살이 쏟아지는 날이면 따스한 온기를 느끼며 걸었다. 주인이 공원을 산책할 때면 푹신한 잔디를 밟았고, 한강변을 달릴 때면 시원한 강바람을 맞았다. 세상은 나의 무대였고, 모든 길은 나의 이야기가 되었다.

짝과 함께였기에 더욱 든든했다. 왼쪽, 오른쪽을 번갈아 가며 주인의 발걸음을 지탱하는 우리는 최고의 파트너였다. 때로는 지치고 힘들었지만, 서로가 있기에 어떤 길도 두렵지 않았다.






나는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그날도 평범한 세탁의 날이었다. 세탁기 안에서 늘 그랬듯 짝과 손을 꼭 잡고 있었다. 수백 번은 더 겪었을 일상적인 세탁이었는데, 그날은 뭔가가 달랐다. 물살이 유난히 거세게 느껴졌고, 어디선가 이상한 소음이 들려왔다.

"물살이 너무 세! 내 손을 꽉 잡아!" "안 돼... 놓치지 마!"

하지만 소용돌이치는 물살 속에서 우리의 손은 점점 미끄러져갔다. 마지막으로 들은 것은 짝의 절박한 외침이었다.

"잊지 마! 우리는 영원히..."

그 뒤의 말은 들리지 않았다. 거센 물살이 우리를 갈라놓았고, 나는 캄캄한 어둠 속으로 휩쓸려갔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빨래 바구니에 홀로 놓여 있었다.

처음에는 희망이 있었다. '분명 어딘가에 있을 거야. 금방 찾을 수 있을 거야.'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 희망은 점점 희미해져갔다. 다른 양말들은 모두 짝과 함께 나란히 서랍에 정리되어 있는데, 나만 구석에 외롭게 처박혀 있었다.

밤마다 악몽을 꾸었다. 쓰레기통으로 버려지는 꿈, 걸레로 전락하는 꿈, 영원히 홀로 남겨지는 꿈... 매일 아침 서랍이 열릴 때마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오늘이 마지막 날일까?



그러던 어느 날 아침, 드디어 그 순간이 왔다. 주인의 손이 나를 집어들었다. 거실로 나왔을 때, 책상 위에는 반짝이는 가위가 놓여있었다. 차가운 가위날이 내 몸을 향해 다가오는 것을 보며, 나는 온몸이 떨려왔다.

"제발... 난 아직 쓸모있는 양말이에요! 조금만 기회를 주세요! 잠깐만요! 제가 뭔가 잘못했나요? 더 열심히 할 수 있어요! 발가락도 더 따뜻하게 감쌀 수 있다고요!"

하지만 내 간절한 외침은 주인에게 들리지 않았다. 가위는 서서히 내 몸을 향해 다가왔다. 눈을 질끈 감았다. 이제 정말 끝인가...

'찰칵-'

예상과 달리 아프지는 않았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눈을 뜨지 못했다. 이제 걸레가 된 내 모습을 보는 게 두려웠다. 그런데 갑자기 움직이기 시작했다. 주인이 나를 어디론가 데려가고 있었다.

'쓰레기통인가...'





하지만, 발걸음이 멈춘 곳에서 들려온 건 뜻밖의 소리였다.



"으앙!" "우리 아가 또 넘어졌네." 

"괜찮아 괜찮아... 엄마가 뭔가 특별한 걸 준비했어. 우리 아기 무릎 다치지 말라고, 이걸로 예쁜 보호대를 만들어줄 거야."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 처음 보는 공간이었다. 분홍빛 벽지가 둘러싸인 아기 방. 그리고 바닥에는 작은 아기가 울먹이며 앉아있었다. 아기의 무릎은 기어다닌 자국으로 살짝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그제야 나는 내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더 이상 양말의 모습이 아니었다. 발목을 감싸던 부분은 깔끔하게 잘려나가고, 남은 부분은 동그랗게 다듬어져 있었다. 주인은 조심스럽게 나를 아기의 무릎에 대보았다.

"엄마가 특별한 무릎보호대를 만들어줬어. 이제 아프지 않을 거야."

순간 온몸에 전율이 흘렀다. 나는 버려지거나 걸레가 된 게 아니었다. 새로운 생명을 이어주고 보호하는 특별한 존재가 된 것이다.


넓은 거리를 누비던 예전과는 달리, 작은 방 안에서 아기의 무릎을 지키는 것이 이제 나의 일이 되었다. 처음에는 이 좁은 공간이 답답하게 느껴졌다. 수많은 풍경을 보며 달리던 나였는데, 이제는 같은 벽지와 천장만 바라보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점차 이 작은 방도 하나의 우주라는 것을 깨달았다. 아기가 첫 걸음마를 떼는 순간의 떨림, 기어가다 작은 장난감을 발견하고 환호성을 지르는 순간의 기쁨, 엄마 품에 안겨 책을 읽는 고요한 순간의 포근함. 이 작은 방은 매일 새로운 이야기로 가득 찬다.





이제 나의 세상은 이 작은 공간이다. 



나는 매일 작은 기적을 목격한다. 첫 걸음마의 떨리는 순간부터, 조금씩 자신감을 얻어가는 발걸음까지. 이 모든 순간이 내가 지키는 작은 우주다.

처음으로 아기의 무릎을 감쌌을 때의 그 느낌을 잊을 수 없다. 양말일 때와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더 부드럽고, 더 소중하고, 더 특별한 책임감이 느껴졌다.

이제 나의 세상은 이 작은 방이다. 더 이상 넓은 거리를 누비지는 못하지만, 대신 아기의 모든 첫 걸음을 함께한다. 넘어질 때마다 보호해주고, 일어설 때마다 힘이 되어준다.


가끔 세탁기에서 헤어진 짝이 생각난다.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어쩌면 나처럼 새로운 삶을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슬프지 않다. 우리는 각자의 자리에서 새로운 의미를 찾아가고 있을 테니까.


오늘도 나는 아기의 무릎을 지킨다. 넘어질 때마다, 일어설 때마다, 첫 걸음마를 뗄 때마다... 이제 나는 안다. 끝이라고 생각했던 순간이 새로운 시작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때로는 인생에서 가장 두려운 순간이, 가장 아름다운 변화의 시작일 수 있다는 것을.


나는 더 이상 '짝 잃은 양말'이 아니다. 나는 이제 '작은 생명의 수호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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