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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 책상 서랍의 비밀 - 숨겨진 이야기의 보관소

2부: 공간의 속삭임

나는 오래된 책상서랍이다. 겉으로는 낡고 평범한 나무 서랍에 지나지 않지만, 내 안에는 이 세상 누구도 모르는 비밀들이 가득하다. 주인의 첫사랑 편지부터 어린 시절 일기장, 돌아가신 할머니의 마지막 사진, 아직 이루지 못한 꿈들을 빼곡히 적은 노트까지. 나는 이 모든 것들을 지키는 비밀의 수호자다.


수년째 나는 좀처럼 열리지 않는다. 

세월의 흔적으로 굳어버린 몸 때문이기도 하지만, 어쩌면 이건 내가 선택한 운명인지도 모른다. 주인의 비밀을 더 단단히 지키기 위해서. 하지만 가끔 밤중에 주인이 홀로 찾아와 나를 열 때면, 내 심장은 마치 처음인 것처럼 두근거린다.





그러던 어느 날, 큰 위기가 찾아왔다. 이사를 앞두고 주인의 아내가 대대적인 대청소를 시작한 것이다. 그녀는 오래되고 쓸모없는 물건들을 정리한다며 책상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

"여보, 이 낡은 책상은 버리는 게 좋겠어요. 서랍도 잘 안 열리고..."

그 순간 나는 얼어붙었다. 내가 버려진다면, 내 안의 소중한 비밀들은 어떻게 되는 걸까? 주인의 대답을 기다리는 순간이 한 세기처럼 느껴졌다.


"아니, 이건 놔두자. 오래된 물건이라도 가치가 있는 것들이 있어."

주인의 말에 안도했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청소를 하던 아내가 우연히 내 손잡이를 잡아당긴 것이다. 하지만 나는 열리지 않았다. 수년간의 고집이 이렇게 도움이 될 줄이야.

"이상하네, 안 열리는데?"


아내는 더 세게 당겼다. 나는 필사적으로 버텼다. 특히 첫사랑의 편지만큼은 절대로 보여선 안 된다. 결국 아내는 주인을 불렀다.

"여보, 이 서랍 좀 열어줘요. 안에 뭐가 있는지 궁금한데."

나는 식은땀을 흘렸다. 하지만 주인은 고개를 저었다.

"그냥 두자. 저 서랍은... 내 어린 시절의 추억이야."

아내는 더 이상 고집을 부리지 않았다. 




하지만 진짜 시련은 그날 밤에 찾아왔다. 



숙제를 하던 아이가 물컵을 엎질렀고, 당황한 나머지 걸레로 닦다가 그만 내 안으로 물이 스며들고 만 것이다.

"안 돼..."

나는 속수무책으로 물에 젖어갔다. 내 안의 소중한 편지들과 사진들이 망가질까 봐 두려웠다. 수십 년간 지켜온 비밀들이 물에 젖어 사라질 위기에 처한 것이다.

다행히 새벽녘, 스며든 물을 감지한 주인이 급하게 나를 열었다. 오랜 시간 동안 굳어있던 내 몸이 신음하듯 소리를 내며 열렸다. 주인은 서둘러 물에 젖은 편지들과 사진들을 꺼내 말렸다.


그때였다. 편지들을 말리던 주인의 눈에서 갑자기 눈물이 흘렀다. 할머니의 사진을 보며, 그리고  이등병 시절 할머니가 연필로 쓰셨던 흐릿해진 젖은 편지를 다시 읽으며, 주인은 아련히 앉아 있었다. 그리고 이내 딸이 나타났다.

"아빠, 왜 그래요?"

"응? 아니야... 그냥 옛날 생각이 나서."

딸은 호기심 어린 눈으로 사진들을 들여다보았다.

"이게 뭐예요?"

주인은 잠시 망설이더니, 딸을 무릎에 앉히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할머니의 사진을 보며 어린 시절 추억을 들려주었고, 첫사랑 이야기도 살짝 들려주었다. 딸은 눈을 반짝이며 들었다.

"아빠도 어렸을 때 이랬구나!"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내가 지켜온 비밀들은 단순히 숨겨두어야 할 것이 아니었다. 이것들은 때가 되면 다음 세대에게 전해져야 할 소중한 이야기들이었던 것이다.

그날 이후, 주인은 나를 정성껏 손봐주었다. 굳어있던 몸을 부드럽게 해 주고, 내부도 깔끔하게 정리했다. 하지만 여전히 나는 쉽게 열리지 않는다. 이제는 내 안의 비밀들이 쓰레기통으로 버려질까 봐서가 아니다. 이 이야기들이 가장 필요한 순간에, 가장 아름답게 펼쳐지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나는 이제 더 이상 불안해하지 않는다. 비록 겉모습은 낡았더라도, 나는 여전히 이 가족의 역사를 간직한 보물 상자다. 때로는 슬픈 기억도, 아픈 기억도 있지만, 그것들마저도 소중한 이야기가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오늘도 나는 조용히 내 자리를 지킨다. 언젠가 또 다른 위기가 찾아올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는 두렵지 않다. 나는 단순한 서랍이 아니다. 나는 이 가족의 역사를 지키는 수호자이며, 때가 되면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되는 곳이다.


그리고 믿는다. 내가 지켜온 모든 비밀과 추억들이, 언젠가 누군가에게 크나큰 위로와 힘이 될 것이라고. 그때까지 나는 계속해서 이 자리를 지킬 것이다. 묵묵히, 그리고 충실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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