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 집 거실 한가운데 깔린 카펫이다. 처음 이 집에 왔을 때만 해도 보드라운 털과 선명한 무늬가 자랑스러웠다. 하지만 그때는 몰랐다. 내가 이 가족과 함께하며 이토록 다채로운 이야기를 만들어가게 될 줄은.
"와, 새 카펫이다!"
설레는 마음도 잠시, 첫날부터 시련이 찾아왔다. 이 집의 막내 식구인 강아지 '멍이'가 나를 물어뜯기 시작한 것이다.
"안 돼! 제발... 나 이제 막 왔단 말이야!"
아무리 애원해도 멍이는 들을 리 없었다. 결국 엄마가 도착해서야 간신히 위기를 모면했지만, 이미 한쪽 구석이 성한 곳이 없었다. 나는 절망했다. 이제 며칠 만에 버려지는 건 아닐까.
그런데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엄마! 이거 봐요! 멍이가 만든 자국이 꼭 하트 모양 같아요! 이제 이 카펫은 멍이의 특별한 카펫이 된 거예요!"
아이의 천진난만한 말 한마디에 엄마의 표정이 누그러졌다. 그 순간부터 멍이의 장난은 내 존재의 일부가 되었다. 나도 점차 멍이를 이해하게 되었고, 어느새 우리는 가장 친한 친구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진짜 시련은 따로 있었다.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무시무시한 녀석이었다.
"안녕? 이제 내가 이 집의 청결을 책임질 거야."
딱딱한 소리와 함께 '윙'하고 나타난 검은 원반. 그것이 내 생활을 완전히 뒤바꿔놓을 줄은 몰랐다.
'안녕하신가! 난 최신형 로봇청소기야. 이제부터 이 집의 청결은 내가 책임지지.'
처음 만난 날부터 그는 거만했다. 반짝이는 LED등을 자랑스럽게 깜빡이며 내 위를 빙글빙글 돌았다. 나는 순간 등골이 오싹해졌다.
"어머, 이거 털 흡입력이 정말 좋네!" 엄마의 감탄사와 함께 시작된 나의 악몽. 로봇청소기는 매일 아침 정해진 시간에 나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삐빅- 털 감지, 강력 모드 작동!" 청소기가 갑자기 빨간 불을 반짝이며 고속 회전을 시작했을 때, 나는 진짜 혼날 뻔했다. 내 털이 소용돌이처럼 빨려 들어갔다.
"살려주세요! 누가 좀 저 기계를 멈춰주세요!" 그때였다. 평소엔 나를 물어뜯기 바빴던 멍이가 달려와 로봇청소기 앞을 가로막았다.
"왈! 왈왈!" 멍이는 마치 나를 지키려는 듯 청소기 앞에서 꼬리를 세우고 으르렁거렸다. 로봇청소기는 잠시 멈칫했다.
'흠... 반려동물 감지. 청소 방해 요소 발생.' 청소기가 우물쭈물하는 사이, 멍이는 내 위에 드러누워버렸다. 평소 나를 괴롭히던 녀석이 이번엔 나의 방패막이되어준 거였다.
그 순간 로봇청소기의 LED 등이 잠시 깜빡거렸다. '작동 모드 변경. 반려동물 보호 모드로 전환합니다. 흡입력 30% 저하.'
이 사건 이후로 로봇청소기는 한결 부드러워졌다. 멍이가 있을 때는 조심스럽게 돌아가고, 나를 청소할 때도 강력 모드는 자제했다.
그러던 어느 날, 큰 위기가 찾아왔다. 대청소 날, 엄마가 새 카펫 쇼핑몰을 둘러보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너무 낡았으니 바꿔야 할 것 같아."
그 순간, 멍이가 내 위에 드러누워 졸기 시작했다. 평소엔 귀찮게 굴던 로봇청소기도 내 주위를 조심스레 돌아갔다.
"엄마, 안 돼요! 이 카펫에서 제가 처음 걸음마도 배웠잖아요. 멍이도 이 카펫을 제일 좋아한다고요!"
아이의 외침에 엄마는 잠시 멈칫했다. 그리고 이내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래... 우리한테는 이 카펫이 최고구나."
그날 이후, 나는 더 이상 완벽한 모습만을 고집하지 않게 되었다. 커피가 쏟아져 생긴 얼룩, 크레파스 자국, 멍이의 이빨 자국... 이 모든 것들이 우리 가족의 이야기였다.
시간이 흘러 이사를 가게 되었을 때도, 나는 당당히 이 가족과 함께 새집으로 향했다. 낡고 해진 모습이었지만, 나는 자부심이 있었다. 내가 이 가족의 추억을 가장 많이 담고 있다는 것을.
요즘도 가끔 힘들 때가 있다. 하지만 더 이상 두렵지 않다. 내 위에서 뛰어노는 아이들의 웃음소리, 멍이의 따뜻한 온기, 가족들의 일상적인 발걸음 하나하나가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가고 있으니까.
나는 카펫이다. 발밑에 깔린 평범한 존재이지만, 이 가족의 소중한 순간들을 고스란히 담아내는 특별한 존재다. 비록 완벽하진 않지만, 이 가족과 함께 나이 들어가는 것이 자랑스럽다.
이제 나는 안다. 진정한 가치는 새것처럼 깨끗한 모습이 아니라, 함께 만들어가는 추억과 이야기에 있다는 것을. 오늘도 나는 새로운 발자국을 기다린다. 그 발자국 하나하나가 모여 우리 가족의 역사가 될 테니까.